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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외출해야 했던 이유, <외출>

삶의 폭력성에 대한 허진호 감독의 성숙한 시선 보여준 <외출>

상당히 심각한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몇개의 물건들이 있다. 그 물건들을 찾으러 두 남녀가 경찰서를 찾는다. 서영(손예진)과 인수(배용준)다. 이 물건은 그들의 소유가 아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는 그들의 배우자들에게 속한 물건들이다. 플라스틱 바구니에서 투명 비닐 봉투로 휴대폰과 립스틱, 자잘한 소지품 등이 옮겨진다. 서영과 인수는 카메라 앞에서 좀 망설인다. 누구의 것일까? 서영이 카메라를 자신의 비닐 봉투 안으로 옮긴다. 사고의 흔적을 담은 애처로운 물건들 속에 낯설게 자리한 콘돔은 서영과 인수를 당황케 한다. 콘돔만이 아니다. 휴대폰엔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서영과 인수는 각기 배우자들의 휴대폰을 교환하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발신함과 수신함에는 사고를 당하기 전 이들의 배우자들끼리 나눈 사랑의 이야기와 약속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의 배경이 좋다. 70, 80년대를 뒤돌아보게 하는 삼척의 어느 카페 안에 서영과 인수가 마주보며 앉아 있고 벽면은 사람들이 남긴 메모와 편지로 뒤덮여 있다. 겹겹이 쌓인 그 흰 종이들은 제시간에 만나지 못한 연인과 친구들이 놓쳐버린 시간에 대한 회한과 가까운 미래의 약속들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결정적인 것은 카메라에 담긴 이미지와 소리다.

우리는 처음엔 서영의 눈과 귀를 통해 카메라에 담긴 그녀의 남편과 인수 아내의 정사장면을 흘깃 보게 된다. 서영이 그 카메라가 남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수에게 주고 난 뒤 좀더 많은 이미지들이 보여진다. 인수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맺고 있는 친밀한 성관계를 아내의 카메라에 찍힌 동영상을 통해 본다. 차마 볼 수 없는 마치 이미지의 역병, 돌림병, 페스트를 보아버린 것이다. 이 외상을 더욱 깊숙이 파고드는 것은 이 동영상에 담겨 있는 두 남녀가 현재 혼수상태이며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상태라는 점이다. 다른 영화라면 이 외상 자체의 기원과 전개와 증후가 거대한 파도처럼 텍스트를 출렁이게 했을 것이나 <외출>은 이미지의 역병을 봐버린 여자와 남자의 심상을 그야말로 겨울 속의 봄, 봄 속의 겨울처럼 따라간다. 역병처럼 출현한 동영상 이미지가 자연 풍경의 막막한 서정과 평행선을 그리는 것이다. 영화는 두 남녀의 마음의 절기를 4월의 눈, 봄의 겨울로 헤아리고 있으나, <외출> 속에서 펼쳐지는 것은 사실은 겨울 속의 봄과 같은 유사 치유 효과를 갖는 기후, 그 기상 상태다.

이미지의 역병을 봐버린 남과 여

현재 꼼짝없이 병상에 누워 주삿바늘에 몸을 의지하는 두 남녀가 가까운 과거에 촬영된 동영상 속에서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서로를 친밀하게 원하고 있다면, 서영과 인수는 바로 그 두 남녀 때문에 삼척의 병원과 모텔에 몸이 매어 있다. 때는 겨울이라 사방이 눈 천지고, 외투는 두껍기만 하고 풍경은 황막하며, 남편과 아내는 언제 깨어날지, 깨어나기나 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자, 이제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원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화양연화>에서도 비슷한 설정을 만난 일이 있기는 하다. 핸드백과 넥타이 선물을 실마리 삼아 자신의 배우자들끼리 사랑에 빠진 것을 안 장만옥과 양조위는 점차 서로에게 매혹되지만 자신의 배우자들이 했던 일- 육체적 관계- 의 반복을 필사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그들 배우자들의 행위를 모방하지 않는 절제만이 이들에겐 구원이 된다. 물론 이것은 억압이 따르는 일이다. 금욕과 욕망을 동시에 나타내는 장만옥의 화려하게 채색된 드레스와 목을 죄는 높은 스탠드칼라는 가슴 아프게 절묘한 설정이다. <외출>은 비교적 일찍 <화양연화>로부터 떨어져나온다. 인수는 오지 않을 위안을 찾아 모텔 복도 건너편, 서영을 술에 취해 방문했다 깊은 사과를 하고, 인수와 술을 마시던 서영은 “우리 사귈까요? 일어나서 기절하게”라고 농담을 건넨다. 이후 둘은 사귄다기보다 함께 자게 된다. 또, 영화는 이들의 마음과 몸의 행로나 동선을 따라간다기보다 심리나 육체의 윤곽을 어슴푸레하게 조망하면서 배우자들의 ‘불륜’의 행동을 반복하고 모방하는 이들을 보여준다. 물론 안타까운 것은 이 두 번째의 불륜에는 대학교 동아리(사진반) 시절부터 오랜 관계를 맺어왔던 그들 배우자들의 관계가 보여주는 스스럼없음과 장난기, 케세라세라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심스럽고, 항상 병원 간병인들의 호출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욕망의 실현에 대해 육체적으로 그리고 감정적으로 용감하다. 특히 나는 이렇게 말하는 서영에게 측은한 마음이 간다. ”아빠가 빨리 결혼하라고 해 맞선 보고 결혼하고, 처음에는 좋았는데….” 그녀는 가정주부이다. 자신의 남편이 사랑한 여자가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고 “일하는 여자를 좋아하나봐요?” 하고 인수에게 안타까운 무심함을 담아 묻는다.

<화양연화>가 선택했던 뼈아픈 금욕보다는 자신의 배우자들끼리의 불륜장면을 재연하게 되는 반복이란 통속에 빠진다면 빠지는 것인데…. 그러나 이 통속성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통속하면서 울부짖고, 떠난다며 가다가 다시 뒤돌아 뛰어와 매달리고, 우울과 울음의 클로즈업이 영화적 테크닉의 태반이고 하는 통속의 관행으로 가는 대신 <외출>은 대담한 생략을 선택함으로써 오히려 통속성을 추상화해 상위의 윤리적 세계를 일별케 한다. 이들의 관계는 불륜이라기보다는 친윤리적이다. 배신과 절망이라는 절통한 상황에서 자신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원하게 되고 교감하게 되는 것 말이다. 혹, 지적받을 수 있는 <외출>이 주는 여러 가지의 불편함- 1.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배우자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데…. 2. 영화 편집이 너무 끊어지는 것 아냐? 3. 미장센의 세부묘사가 좀 떨어지지 않는지? 4. 배용준의 연기가 과연 멜로드라마에 어울리는 것인가? 5. 서영과 인수가 사랑하기나 한 걸까? 6. 복수 아닐까? 등의 의문과 지적에 대해 나는 이러한 조금씩의 불편함이 이 영화를 통속성 100%와 개연성 제로의 상황 설정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감독 허진호는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에서 장면과 장면의 틈새가 벌어지지 않는 연출력을 보여왔다. 그의 천천히 흐르면서도 작은 매듭들을 만드는 영화적 리듬감은 때로 감탄할 만하다.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손길이 어린 <8월의 크리스마스>의 색채와 빛은 부드럽고 반짝이다가 곧 스러지는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 보고 싶어라!) 의 관계에 꼭 들어맞는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영화적 시간은 얼마나 유려하게 흐르는가? 전작의 배우들인 심은하, 한석규, 이영애, 유지태 등은 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던가. 그러한 전작들을 참조해, 난 영화 <외출>의 어딘가에 거친 날이 선 과묵함, 이 장면에서 저 장면으로 갈 때의 선뜻한 편집(황막하나 아름다운 설원의 풍경에서 지극히 소소한 병실이나 모텔의 복도), 심지어 조명을 다루는 사람이 주인공인 영화인데도 장면 속에 빛을 일상적으로 배치한 것 등에 눈길이 간다. 매끄럽게 연출해오던 사람임에도 이번 영화는 중간중간 그것을 슬쩍 피해갔다. 난, 그 점이 오히려 운명이라고 알려진 삶의 은근하고 노골적인 폭력성을 이해하는 감독의 성숙을 보여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크게 보자면 서영과 인수는 주어진 운명과 자기 의지라는 로베르 브레송의 주제를 변주하는 셈이다.

빛의 마술을 기대했건만

<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진사가 그렇고 <봄날은 간다>의 음향녹음 기사와 방송국 PD도 그렇고 이번 <외출>의 조명기사도 그렇고 허진호 감독은 사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좀 쉽게 그 생활과 내막을 알아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위의 세 작품들은 사진과 음향 그리고 조명에서 출발하거나 그를 빗댄 삼부작이다.

영화 <외출>의 첫 장면은 좀 의외다. 거친 조명을 받고 있는 인수의 클로즈업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의외인 것은 그것이 허진호 감독의 스타일과도 다르고 배용준의 스타 이미지와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곧 밝혀지기를 인수는 공연을 위한 조명 리허설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전화를 급작스레 받은 것이다. 이후 중환자 수술실, 유리가 산산이 부서진 차, 병원 주변의 메마른 거리와 모텔 실내 등 빛은 없고 어둡기만 하다. 불시에 위기에 처한 일상의 어둠이다. 위에서 “사진, 음향, 조명”의 삼부작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영화는 사실 이상하리만큼 조명감독인 주인공의 직업을 영화 안으로 깊이 끌어들이지 않는다. 무대의 빛을 다루는 사람이 운명의 어둠을 만났을 때 드러날 수 있는 극단적 명암대비를 통한 키아로스큐로 조명법이라든지 하는 예상할 수 있는 조명 기법들을 영화 텍스트 안에 초대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숏이 거친 조명을 받고 있는 배용준의 얼굴 클로즈업이라 기대가 일었고, 더구나 인수의 조수는 등쪽에 ‘Light box’라고 커다랗게 쓴 티셔츠를 입고 등장해 영화 속 빛의 마술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아쉬운 일이다.

다만 이 영화에서 빛의 존재감이 느껴지는 장면은 서영이 남편의 병실을 청소할 때 하얀색 커튼 위로 쏟아지는 햇살을 볼 때다. 찬바람이 열린 창으로 들어와 커튼을 날리고 겨울 햇살은 허옇다. 병실로 쏟아지는 칼날 같은 겨울바람과 햇살 , 인수와 서영이 ‘외출’을 해야 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외출>을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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