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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운명> 제작기 [2]
문석 2005-09-20

# <너는 내 운명> 에피소드Ⅱ: 박진표 감독의 역습

2005. 5. 9 충남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 왜목마을 방파제

혹시 전인권의 <돌고 돌고 돌고>는 이곳에서 쓰여진 게 아닐까. 왜목마을은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는 모습을 모두 한곳에서 볼 수 있는 전국 유일의 장소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자연의 신비는 제작진이 이곳을 촬영지로 선택한 이유와 아무 관련이 없다. 안수현 PD는 촬영 포인트인 방파제의 뒤편으로 보이는 풍광이 아름다워서 왜목마을을 찾았다고 한다.

이날 찍을 분량은 70번 신과 73번 신이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해당하는 장면으로, 급작스레 찾아온 불행의 그림자로 인해 급기야 석중 곁을 떠나게 된 은하가 어떤 부둣가의 방파제 앞에 바람을 맞으며 잠시 회한 어린 표정을 짓는 대목이 70번 신이고, 그런 은하의 족적을 찾아 헤매던 석중이 은하가 서 있던 그 방파제에서 흐느끼는 부분이 73번 신이다. 완성본에서 73번 신은 10여초에 불과하고, 70번 신은 정말 순간에 지나지 않으니 이날 하루는 얼마나 허탈한가, 싶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특히 73번 신은 “은하를 향한 석중의 감정이 폭발할 때”이므로 극 전개상 중요하다는 게 박진표 감독의 설명이다. 영화 안에서도 온몸을 바닷물로 적셔가며 석중이 “은하야∼”라고 외치는 장면은 꽤나 애절하게 느껴진다.

이날의 촬영은 곧 ‘물때’와의 싸움이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이다보니 오후녘부터 물이 들어와 저녁 무렵에야 빠지기 시작한다니 실제 촬영이 가능한 시간은 매우 짧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박진표 감독의 모습은 여유롭다. 방파제 위로 앰프를 옮겨 여전히 <낙원>을 들으면서 서성이고 있는 그에게선 30억원 가까운 예산의 상업영화를 처음 만드는 ‘신인감독’의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10년 넘는 방송사 PD 경력이 있고 <죽어도 좋아>를 만들었다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배우와 팀워크가 잘 맞는 스탭 덕분에 ‘날로 먹는다’ 해도 과연 저럴 수 있을까 싶다.

방파제 끝에 배를 매달고 회를 팔던 ‘횟배’가 방파제 위로 넘실거리는 물살을 피해 모래밭쪽으로 이동할 때쯤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발을 물에 담근 채 불어오는 바람을 참고 있던 황정민도 긴장 어린 표정이 된다. 73번 신은 방파제 끝에서 해변을 바라보는 앵글로 찍었다. 촬영팀과 조명팀은 바지를 훌훌 걷고 신발을 벗은 채 철이른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고, 동시녹음팀도 휴대용 장비를 어깨에 멘 채 물로 향했다. 반면, 나머지 스탭들은 카메라 앵글을 피해 주변의 절벽 뒤로 숨어야 했다. 이들은 서서히 감시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까 펄에서 잡은 새우를 끓여먹기도 하고 시시덕거리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이 와중에도 촬영 스탭들과 황정민은 금세 차오르는 물을 피해 계속 방파제를 오르며 촬영을 하고 있다. 결국 차오르는 물 때문에 촬영을 일단 접고, 안수현 PD가 휴식을 선포한다. 해가 지기 직전 물이 빠질 때 촬영을 재개한다는 계획이다.

감독님, 너무 여유있는 거 아네요?

이 틈에 박진표 감독은 ‘여유 모드’로 돌아왔다. 횟배에서 잡은 생선회와 부둣가 할머니들이 손수 깐 굴을 앞에 놓고 감독에게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첫 상업영화를 찍는 기분? 아직 촬영이 끝나지 않았지만, 일에선 별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진정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한다면 소통에 있어선 똑같을 테니까.” 본격 상업영화라고 하지만, <너는 내 운명>은 <죽어도 좋아>의 연장선 위에서 읽히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과 사회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이뤄내는 주인공들을 그리니 말이다. 그런데 박진표 감독은 왜 극한의 사랑 이야기를 또 만들려는 걸까. “겉으로는 극한적인 사랑으로 보이는데, 우리가 생각하기 싫고 보기 싫어서 그렇지 굉장히 평범한 사랑이다. 우린 노인들의 사랑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생각조차 않는데 따지고 보면 남자와 여자니까 사랑하는 거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엔 농촌 총각과 인생을 막 굴러먹던 여자인데다 에이즈가 끼어들어 극한적으로 보이지만 보통 사랑인 거다.” 그렇다면 혹시 이번 영화도 한국사회의 표현의 한계를 시험할 만큼 파격적일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데, 박진표가 만들면 셀 거다라고 하더라. 사실, <죽어도 좋아>의 경우엔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지 않나.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아주 뽀사시하고 예쁘게 보여주고 싶다. 노출이나 폭력이 세지 않아도 숨막히게 야한, 관객을 설레고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 두 번째 성기노출 파문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불행한 일이지만, <너는 내 운명>의 노출 수위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몇몇 장면은 정말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은하와 석중이 첫 키스를 하는 장면에선 침이 꼴깍 넘어가며, 거의 보이는 게 없는 첫 정사 때도 야릇한 에로티시즘이 빛을 발한다.

따사로운 햇볕과 3번째 소주잔이 합심해 알코올 기운을 온몸에 뻗치려는 순간, 스탭들의 발소리가 다급한 분위기를 전한다. 이제 바닷물이 빠질 때가 된 거다. 물이 먼저 돌아가냐, 해가 먼저 돌아가냐의 상황에서 스탭들은 카메라가 먼저 돌아갈 수 있도록 분주히 움직인다. 세팅이 얼추 끝날 무렵 코트를 입은 전도연이 황급히 나온다. 스러지는 햇살을 붙든 채 카메라가 돌아가자 전도연의 표정에선 먼발치에서도 느껴지는 스산함이 맴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감독에게서 호기 어린 소리가 튀어나온다. “오케이!”

# <너는 내 운명> 에피소드Ⅲ: (21세기형) 신파의 귀환

2005. 6. 12 전북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전주지방법원

점심식사를 막 마친 데서 오는 식곤증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건물이 만들어낸 그늘마다 어깨를 낮춘 스탭들이 삼삼오오 모여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는 갑자기 치솟은 기온보다, 이날 촬영이 총 69회차 중 61회차였다는 사실이 더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남원, 순천, 영주, 당진, 삼척 등을 가쁘게 오가며 쌓인 피로가 스탭들의 몸놀림을 슬로 모션으로 만들어놓은 게 틀림없다. 이날 촬영해야 하는 분량이 전도연의 격렬한 감정 신이라는 점도 분위기를 더 가라앉게 만들었으리라. 피로한 육체 위에 눌러앉은 긴장감만큼 무거운 것도 세상엔 또 없다. 이날 촬영해야 하는 장면은 87번 신과 94번 신. 은하가 에이즈에 감염된 채 생활하다가 보건당국에 붙들려 재판을 받기 전후의 상황으로, 영화 속에서는 두 장면 모두 구치소를 배경으로 하지만, 전날 법정 내부장면을 찍은 탓에 편의상 법원 안의 공간에서 촬영됐다. 94번 신이야 석중 어머니(나문희)와의 면회를 하기 위해 은하가 대기실을 나오는 대목이라 특별한 감정 처리가 필요없지만, 은하가 국선변호사 앞에서 울부짖는 장면인 87번 신은 꽤나 세심한 감정 표현이 필요한 장면이다.

이런 날, 특히 여배우의 중요한 감정장면을 찍을 때는 모든 스탭들이 발걸음조차 신경써야 하는 것이 현장의 불문율이거늘, 감독 모니터 주변에서 고성이 들려오니 이게 웬일. “아아이∼ 그러지 마∼ 호호호홍….” 이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필시 전도연이렷다. 아니나 다를까, 모니터 앞에는 다소 수척한 얼굴의 전도연이 매니저와 장난을 치고 있다. 안수현 PD는 의상팀원들과 함께 “도연이는 수의(囚衣)를 입어도 예쁘다”며 추어올린다. 푸른색과 하늘색 스트라이프 디자인이 수의라기보다 잠옷처럼 보이는데, 실제로 여죄수들이 입는 옷이란다. “그나마 일부러 색도 바래게 한 거란 말야∼.” 전도연이 특유의 반말투로 콧소리를 낸다. 94번 신을 가볍게 끝마쳤다지만, 곧 다가올 촬영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도 전도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조잘거린다. 아니, 정녕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긴장하지 않는 연기의 여신이란 말입니까, 감탄하려는데 “30분 뒤에 테스트 촬영 가겠습니다”라는 연출부의 말을 들은 전도연이 콘티책에 얼굴을 묻는다. 이윽고 박진표 감독이 어슬렁 나타나 전도연을 데리고 법원의 안마당을 느리게 돌기 시작한다. 안수현 PD는 “배우와 함께 산보하는 게 감독의 습관”이라고 말해준다. 무슨 말을 하는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숙연하다.

이윽고 다소 비좁은 판사 대기실에서 카메라를 거의 바닥에 내려놓다시피 낮은 앵글로 잡은 채, 87번 신의 촬영이 시작된다. “변호사님, 나 좀 살려줘요… 나 말짱하단 말야. 내가 에이즈에 걸린 것 같아요? 봐요 말짱하잖아!” 하며 전도연이 가슴을 풀어헤치는데(물론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단추가 안 풀어진다. 결국 단춧구멍을 자르는 ‘공사’를 한 뒤 다시 촬영이 이어진다. 2분 가까운 롱테이크인 탓에 감독의 입에선 “오케이”란 말이 쉽사리 안 떨어진다. 변호사 역을 맡은 백윤식의 아들 백도빈도 긴장하긴 마찬가지인 듯, 연신 넥타이를 매만지며 대사를 되뇐다.

사랑은 유치한거야 그런거야?

카메라가 멈춘 동안, 감독의 앰프에서는 어김없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음악 속 주인공이 터보와 신성우, 박진영으로 바뀐 것이다. 아무래도 이 선곡은 고의로 느껴진다. ‘영화의 감성이 올드하니까 음악도 올드하게 간 건 아닐까?’ 하는, 논리적 비약이 섞인 의문이 든다. 사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약간의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다. ‘쿨’한 감성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데다, ‘너는 내 운명’이라고 노골적으로 부르짖는 신파적 감성이라니, 21세기에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하지만 박진표 감독은 의도적으로 이 영화 안에 신파적 요소를 담았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직설적이며 유치한 대사로 이뤄져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사랑을 표현하고 사는데, 요즘 영화들이 보여주는 사랑은 그렇지 않다. 나는 뻔뻔스럽게 표현하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사랑하고 살면 좋겠다는 마음도 담았다.” 그런데, 진짜 사랑이 그런 걸까. 사랑이 뭐기에. “사랑이란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그래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비슷하다. 영원한, 운명적인, 끝까지 가는, 그런 사랑 말이다. 나 또한 그렇다. 내 영화의 모토는 사랑이다. 내 인생의 모토도 사랑이다. 내 에너지는 설렘이고 열정이다. 앞으로도 어떤 형태든 간에 사랑영화를 할 거다.”

한데, 희한하다. 막상 이 ‘사랑 지상주의자’의 영화는 그리 신파적으로 느껴지지 않다. 석중이 에이즈에 걸린 은하를 쫓아가고, 면회실을 부수고, 몇년 동안 온 마음으로 기다리며 구닥다리 사랑의 감성을 죽 펼쳐놓는데도, 닭살스럽다거나 짜증이 나진 않는다. 오히려 이 단순하고 촌티나는 사랑 이야기는 배우들의 힘있는 연기, 현실적이고 급박한 상황, 진중한 연출이라는 옷을 한 꺼풀씩 입으며 삶과 사랑의 진실한 순간으로 탈바꿈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도 그렇지만 진짜 사랑은 별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우리 마음속의 사랑이 너무 큰 게 탈이지.” 박진표 감독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사랑에 관한 선문답으로 흐르지만, 그가 만든 <너는 내 운명>은 사랑에 관한 가장 직설적이며 명쾌한 문답인 셈이다.

예상보다도 촬영이 오래 진행되고 있다. 지난번만 해도 시원시원하게 “좋았어”라고 말하던 그가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며 무전기로 세심하게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별 문제 없이 연기를 마친 것 같은데도, 감독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무언가를 골몰하기도 하고, 모니터를 보러나온 전도연에게 뭐라고 속삭이기도 한다. 불과 2주일 사이 15kg을 뺐다는 황정민도 촬영분량은 없지만 현장에 나와 이 고민에 동참한다. 초여름의 기운찬 햇살이 슬그머니 고개를 떨굴 무렵, 감독은 마침내 오케이 사인을 낸다. 그러면서도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혹시 저 사랑밖에 모르는 감독은 배우, 스탭과의 이별이 두려운 게 아니었을까. 몇초라도 더 붙들면 그들에 대한 미련을 조금이라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너는 내 운명>의 시사가 끝난 극장 앞마당에서 가을 햇살 틈새로 스치고 지나간 바람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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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씨네21> 사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