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두근두근 체인지>(이하 <두두체> - 나도 이런 거 한번 해보고 싶었다)의 본방을 앞두고 주연배우들과 스탭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식을 했다.
술잔이 여러 번 돌고 우리는 기분 좋은 아사리 난장판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 체리필터의 <오리 날다>를 부르다 천장에 머리를 받았다.
그때, 매니저 한분이 살짝꿍∼ 긴장된 표정을 하고선 손님이 한분 오셨다고 했다.
‘손님? 누구? 근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고현정이라도 왔나?… ㅋㅋㅋ’
문이 열리며 고현정이 들어왔다.
방 안엔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나타난 그녀의 머리칼은 젖어 있었다.
<두두체>의 파일럿을 보고 너무 행복하게 웃었다고 했다.
그걸 만든 사람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머리카락을 말리는 시간도 아까웠다고 했다.
한마디로 버선발로 달려왔다는 소리였다.
내 가슴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두두체>에 내 혼을 담으리라!
쓰다 죽으리라!
<두두체>는 나의 유작이 될 것이다!
고현정에게 무슨 말을 할까?
무슨 말을 하면 그녀가 나를 근사한 사람으로 기억할까?
장고 끝에 결국 내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한 말은….
‘너무 아름다우십니다’였다.
켠이 안성댁에게 그랬듯 나는 바보가 되어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겸손하지도 너무 거만하지도 않은 미소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지금 누구랑 있는지 알면 넌 기절할 거야! 누구냐 하면… 고! 현! 정!’
친구 왈
‘그냐? 나는 고소영이랑 맞고 치고 있는데….’
나는 그 친구랑 아직도 연락을 안 하고 산다.
암튼, 그날 ‘내가 언제 또 이 여인과 러브샷을 하랴!’ 싶은 맘에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셨다.
취하니까 미쳐지더라고,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 두었던 말을 해야겠다 싶었다.
그녀가 박효신의 <바보>를 부르고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자리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현정씨! 사랑합니다… 10년 전부터 사랑해왔습니다.’
갑자기 주변에 있던 매니저가 풋∼ 하고 웃는다.
왜∼ 웃지?
그날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와의 술자리는 그뒤 몇번이 이어졌다.
가끔 그 자리엔 처음 그녀와 술을 마시는 누군가가 함께하기도 한다.
그는 말한다.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한 시간쯤 지나 그는 불고구마가 된 얼굴로 그녀에게 말한다.
‘현정씨! 사랑합니다. 10년 전부터 사랑해왔습니다.’
이젠 내가 푸훗∼ 하고 웃는다.
어쩌면 모두들 그리도 한결같을까?
송파구 잠실2동에 위치한 연예인만남 기술학교 3학년 선택과목 ‘고현정과의 대화법’ 시간에 그걸 가르친다는 소문이 사실일까?
믿기 힘들겠지만 나도 대구에 계신 박말분 여사(우리 엄마) 말고 다른 누군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도 그런 말을 들으니까 느끼해지더라.
‘그래?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사실 첨 봤을 땐 어디가 혼나게 생겨서 딱 밥맛이었는데 보다보니 면역도 되고 나름 개성있다는 식의 포지티브한 시각도 생기더라.’
사랑 고백 맞아?
한 사람에게 여러 번 사랑해를 듣는 것과 여러 사람에게 여러 번 사랑해를 듣는 건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자주 못 들어봐서 그런지 ‘사랑해’라는 말을 들으면 내 골수라도 빼주고 싶게 설레고 고맙다.
그녀는 분명 사랑스럽다.
비가 오래 내리지 않는 아프리카의 깡마른 아이를 안고 있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다정하고 따듯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낮에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사랑해’라는 말이 주는 고봉밥처럼 든든하고 충만한 기쁨을 아직도 누리고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고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