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하다. 본의 아니게 노무현에 대해 “왕이기를 거부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찬사와 “국민은 젖달라고 하는데 대통령은 책 읽어준다”는 비판 사이에서 오래 헷갈렸었다. 다 내 머리를 믿지 않고, 그놈의 정치권이니 언론이니 하는 구닥다리 ‘게이트 키퍼’들을 의지한 탓이다.
대연정 발언 시리즈 와중에 문득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하나도 불안하지 않다는 사실, 협박당한다는 느낌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이 잡는 자세로 머릿속을 뒤졌더니 다음과 같은 통찰의 사리가 수확되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불온하다. 그 어떤 진보적인 발언도 존재를 위협하는 불이익을 받지 않는 시대에, 그래서 그 발언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진보’라는 단어 자체의 스릴과 매력이 없어져버린 시대에, 불이익을 자청하는 그의 정치철학은 불온하다. 대통령 자리와 여당과 이른바 국민여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그의 태도를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다 선뜻 못 받아들이고 황당해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만둘 수도 있는 것이 대통령 자리라는 천기를 누설했다는 점에서 그는 불온하고, 그 불온성은 기존의 엘리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잘난 척’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단수이다. 유권자나 열린우리당이나 한나라당이나 좆똥 같은 언론을 상대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 역사를 상대하겠다고 결심하다니! 예측불가능한 것들과는 상대하지 않고, 진심을 걸어 이길 것이 확실한 것들만 상대하는 노무현은 그러므로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는 지성인이다. 지성이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그 질문을 포기하고 싶어하는 자신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살아 있는 정신. 그것이 인간 노무현을 대통령 노무현으로 만들고, 대통령 노무현으로 하여금 늘 인간 노무현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한때 그는 신분상승의 욕구에 불타는, 공부 잘하는 젊은이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그에게 각성의 순간이 있었(다고 믿어지)고, 그 각성이 그를 드라마틱한 우회로를 거쳐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후, 그는 초심을 항심으로 가져가는 이 사회의 몇 안 되는 각성한 인간이 되었다.
지금 그는 소통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역구도를 타파해야 정치가 발전하고, 정치가 발전해야 경제가 발전한다는 쉬운 얘기를 하는데, 누구보다 잘 알아들어야 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척 딴청부리거나 딴죽 걸고 있다. ‘망국적 지역감정’을 한탄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팔짱 끼고 “그게 국정 최우선 과제인가?” 되물으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진심을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의 심리상태 그대로, 일그러진 표정이 되었다. 그는 철학으로 얘기하는데 그 얘기가 이해관계가 걸린 정치 언론 엘리트 구름층을 통과하면서 공학적으로, 음모론적으로 오역된다. 진심이야말로 최고의 정치행위라는 사실을 ‘적’들이 몰라서이다. 사실 ‘적’들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와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모른다. 제 머리로 생각한 지가 한참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릇 국가지도자란 ‘희망’을 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의 맥락상으로, 그 ‘희망’이란 자본주의적 탐욕에 대한 추인과 자본축적 가능성에 대한 최대한의 기대치와 동의어인 것 같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을 전제하지 않은,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은 그렇게밖에는 해석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에라 이, 돈더미에 깔려죽을 국민들 같으니라구!
청와대 만찬에 참석한 열린우리당 의원들은 대통령의 한 시간 반에 걸친 발언 동안 한번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지만, 세계사적으로 전무후무하게 불온한 지성인 대통령을 가진 스스로를 자축하면서, 그들 몫의 박수까지 내가 다 쳐주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위 글의 저작권은 경남 산청군의 농민 이아무개씨에게 75%가량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이다. 신문도 방송뉴스도 보지 않는 그분은, 내 입을 통해 처음 전해 듣는 뉴스 앞에서도 본질을 꿰뚫는 명징한 해석으로, 매일 뉴스 서핑에 시간깨나 할애하면서도 도무지 사태파악이 안 됐던 나를 무지무지 부끄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