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영화기자로서 밥 벌어먹고 살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단신기사에서 시작됐다. 1991년 초로 기억되는데, 당시 <한겨레>의 문화면 귀퉁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히치콕 영화 상영회 개최.’ 생전 들어보지 못한 어떤 단체에서 앨프리드 히치콕의 대표작 10여편을 보여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그 기사가 내 눈에 들어온 건, 지금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동네 재재개봉관을 제집처럼 들락거린 시네키드도 아니었고, 성룡과 할리우드영화, 그리고 홍콩 누아르 외에 한눈을 팔아본 일도 거의 없던 터였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 말년 시절 학점을 좋게 준다는 소문을 듣고 ‘영상미학’과 ‘영상론’이라는 엇비슷한 과목을 동시에 수강했던 경험이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두 과목 모두 수업엔 거의 들어가본 적이 없었기에 후배의 노트를 달달 외워서 시험을 치르긴 했지만. 아마도 그 기사를 유심히 보고 기사에 적힌 전화번호를 누르게 된 진짜 이유는 깃발을 잃은 채 백수로 시간을 때우며 살던 내게 히치콕의 영화가 무언가 새로운 흥밋거리를 주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간 몇번을 물어가며 찾아간 그곳은 마포구 신수동 귀퉁이 어떤 건물 3층에 있는 ‘영화공간 1895’란 곳이었다. 한국 최초의 시네마테크를 표방했던 이곳에선 얼마 전부터 거장들의 작품을 비디오테이프로 틀어주고 있었다. 이 상영회의 첫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다소 황당한 사건 때문이다. 상영회의 관람료를 패키지로 계산하고 나자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L은 처음 만난 이에게는 도발적이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말을 건넸다. “지금 난로에 석유가 떨어졌는데 나는 사무실을 지켜야 하니, 요 앞 주유소에 가서 좀 사다주이소.” 얼떨결에 빈 석유통을 들고 나오긴 했지만, 빈정이 상한 나는 다시 들어가지 말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거금을 이미 지불한 터라 그런 배짱은 부리지 못했고, ‘아, 원래 이곳은 그런 문화를 갖고 있나보다’라고 비겁한 자기합리화를 하며 석유 배달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 석유 배달은 나의 영화와의 진지한 첫 만남을 가능하게 해줬다. 이 일을 뒤늦게 미안해한 L과 자연스럽게 친해졌고, 그를 통해 이곳에 출입하는 다른 이들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 그들과 가까워진 덕에 펠리니, 안토니오니, 고다르, 트뤼포, 베리만 등등 책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감독들의 영화를, 그때까지 봤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를, 꾸벅거리면서라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영화에 관심을 쏟은 덕에 정성일, 이용관, 전양준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영화이론도 조금이나마 주워들을 수 있었고, 결국 영화에 대해 글을 쓴다는 일도 점점 진지하게 느껴졌던 거다.
그러니, 이 모든 건 하찮은 단신기사에서 출발한 셈이란 얘기다. 어디 나뿐이었으랴. ‘XX 수강생 모집’ 따위의 폼나지 않는 기사일 뿐이지만, 이 짧은 글은 이미 많은 이를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와 촬영감독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씨네21>의 국내리포트 지면을 담당하면서 단신기사를 되도록 다양하게 실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디 꼼꼼히 봐주시길. 이 사소한 글이 당신 혹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전환점이 될 수 있기에. (고로 후배 여러분, 단신 하나도 책임감을 갖고, 짧고 힘있게 써달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