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감독, 철의 축구선수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알렉스 퍼거슨 감독
태초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가 있었다. 운하와 철도로 19세기 산업혁명의 엔진이 된 이 공업도시에 ‘철의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른바 맨체스터학파로 불리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산실이 된 이 도시에서 자본과 노동은 강고하게 결합되었고 그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위하여 축구가 발명되었다. 맨체스터 노동자들에 의하여 축구는 민속놀이를 범주를 뛰어넘어 20세기의 최고 드라마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있다. 이 명장을 위하여 반드시 ‘sir’라는 단서를 달지 않으면 안 된다. 셀틱과 레인저스로 양분된 스코틀랜드리그의 역사를 적어도 그가 재임하는 기간만큼은 에버딘이라는 ‘제3자’를 개입해 고쳐 쓰게 만든 뒤 프리미어리그로 자리를 옮긴 이 감독은 또 한번 아스날과 리버풀이 양분했던 리그를 에릭 캉토나, 폴 인스, 숄 샤르 등을 차례로 불러들어 완벽하게 맨유 시대로 바꿨다. 그 정점이 90년대 후반. 98-99시즌에 그는 리그 우승, FA컵 우승, 그리고 유러피안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전무후무의 트레블(Treble)을 달성하였다. 선수들이 트로피를 높이 치켜세울 때 퍼거슨은 버킹검 궁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다.
1941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청교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퍼거슨. 유년 시절을 선박 노동자로 일하며 비공식적인 파업을 주도할 정도로 도전적인 리더십을 지닌 이 명장은 현재 맨유의 그랜드 플랜을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몽정을 시작할 때부터 맨유에서 뛰었던, 지난 18년 동안 맨유의 집합적 영혼의 소액주주인 필립 네빌이 에버튼으로 이적할 때도 퍼거슨은 눈 하나 껌뻑 하지 않았다. 그러자 몇몇 선수들은 휴대폰의 배터리가 충분한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베킹검’ 궁전의 소군주를 향하여 ‘나는 연예인이 아니라 선수가 필요하다’며 축구화를 던져버렸고 베컴은 이마에 밴드를 붙인 채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그리고 영원한 캡틴 로이 킨 등 황금 시대를 빚어낸 스타들은 웨인 루니, C 호나우두, 그리고 박지성을 두려워한다. 오직 맨유를 위해 축구를 하는 퍼거슨 감독이 언제 불의의 전화를 걸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빠르고 정확한 경영 축구
아스날 & 아르센 벵거 감독
프리미어리그라는 공화국의 통수권을 쥐고 있던 군주가 분기탱천하여 “부끄러운 행동을 하고서도 끝까지 사과할 줄 모르다니” 하고 노기를 띠었다. 그러자 도버 해협을 건너와 이 공화국을 점령해버린 경영학 박사가 일갈하였다. “제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앞으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맨유의 퍼거슨과 아스날의 벵거 감독은 현재 사생결단이다. 그러자 같은 하늘을 덮고 잘 수 없는 이 두 사람의 관계 악화를 조절하기 위해 메트로폴리탄 경찰, 리그지도자협회, 축구평론가들 그리고 신성으로 떠오른 포르투갈의 이방인까지 가세하였다. 급기야 아스날과 맨유의 구단 책임자들이 회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격렬한 어록은 지금까지 양산되고 있다.
98년 5월 아스날이 우승을 차지하던 날 신문들은 ‘French Revolution’이라고 썼다. 그 혁명은 2002, 2004년에서도 반복되었다. 더욱이 벵거는 49경기 연속 무패라는 신화를 작성하였다. 벵거 감독은 미드필드를 완벽하게 장악하여 상대팀의 혈관을 모조리 터트린 뒤 티에리 앙리로 하여금 절묘한 슛 경진대회를 하도록 독려함으로써 맨유와 기타등등을 눌러버렸다.
그의 팀 아스날에는 불협화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적어도 선수들의 투덜거림은 숙소에서나 가능한 자유이고 라커룸과 그라운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흡사 아이스하키를 연상시키는 아스날의 패스 워크. 철저히 무릎 아래 패스로 일관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피레스는 앙리와 베르캄프를 위하여 빈 공간으로 찔러준다. 그들의 스피드는 전후반 합쳐 120분 이상 뛰도록 독려하는 벵거 감독의 ‘속도전’의 개가다.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했고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국제정치학에도 조예가 깊은 벵거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빠르고 정확한 패스를 원한다. 나의 꿈은 타이틀을 모으는 게 아니라 가장 완벽한 축구가 그라운드 안에서 5분 만이라도 지속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한다
첼시 & 호세 무링요 감독
바야흐로 축구의 세계화. 그러니까 황금알이 아니라 아예 그것을 낳는 거위까지 통째로 구워먹으려는 자본의 회계사들이 속속 히드로 공항으로 집결하고 있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남부 런던의 크리스털 팰리스를 호시탐탐 노렸는가 하면 타이의 최고 갑부인 탁신 총리도 리버풀의 지분을 인수하려고 했다. 미국 NFL의 갑부 맬콤 글레이저가 맨유를 집어삼켰을 때 맨유 팬들은 ‘잉글랜드 축구의 영혼이 팔렸다’고 통탄했는데 이미 그 이전에, 그러니까 2003년 러시아의 석유 재벌 아브라모비치는 런던의 명문 첼시를 사들여 지난 2년여 동안 2억파운드 이상을 퍼부었다.
그런데 천문학적인 자금으로 명문 구단을 소유할 수는 있어도 우승으로 견인하는 것은 구단주의 몫이 아니다. 그라운드 안에는 감독이 들어가야 한다. 바로 그 자리에 포르투갈의 무링요가 들어왔다. 이로써 잉글랜드 4대천왕의 세 자리는 대륙의 명장들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무링요는 50년 만에 첼시를 리그 우승이라는 권좌에 앉게 하였다.
그는 이따금 퍼거슨과 벵거의 설전에 참여하여 “퍼거슨은 매우 올바른 인품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그 반대로 “아스날이 부진을 거듭할 때 그들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퍼거슨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라 런던을 연고로 하는 더비 라이벌에 대한 경기장 바깥의 설전이랄 수 있다. 그만큼 첼시는 지난 50여년 동안 프리미어의 우승은커녕 상위권 유지 및 아스날에 대한 보복 심리로 일관하여 왔는데 이 포르투갈의 야심만만한 감독은 더비 라이벌을 물리치고 우승까지 쟁취했던 것이다.
아스날의 벵거 감독이 자신의 프리미어 500번째 경기를 축하하기 위한 지난 8월22일의 05-06시즌 2차전. 무링요 감독은 “외국 출신의 감독이 잉글랜드에서 500경기를 치렀다는 것은 환상적인 업적”이라고 평가하면서 크레스포, 로벤, 구드욘센으로 잠시 축하해주는 듯하더니 이윽고 흑진주 드로그바를 투입해 술상을 뒤엎어버렸다.
막강 전투력의 첼시. 그러니까 램퍼드, 테리, 구드욘센, 로벤, 드로그바 등의 강한 캐릭터들를 흡사 손아귀 속의 공깃돌처럼 장악하고 있는 무링요는 “감독은 선수들과 사랑에 빠질 필요가 없다. 다만 선수와의 적절한 관계를 원한다”고 호언한다. 그 대표적인 시범 케이스가 포르투갈에서 함께 건너온 카르발료. 무링요는 “카르발료에게는 IQ 검사가 필요하다”면서 라커룸에 남아 있게 하자 나머지 선수들은 피검 대상에 포함되지 않으려고 재빨리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맨유의 혼 에릭 칸토나처럼 첼시에게는 영원한 첼시맨 지안프랑코 졸라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없다. 프랭크 램퍼드가 그 위대한 자리를 이어받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아직은 아니다. 그게 쥐약이 될지 모른다. 구단주 아브라모비치가 뿌린 천문학적인 액수로 모여든 선수들을 무링요는 ‘첼시의 혼’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적의 리버풀, 전설은 계속된다
리버풀 & 라파엘 베니테스
적어도 ‘계약서’만으로 보건대 리버풀은 2차대전 이후 단 한번도 감독을 ‘경질’하지 않았었다. 실패한 감독들이 왜 없었겠는가. 그래엄 수네스, 로이 에반스처럼 안타까운 기록만 남긴 감독도 있었거니와 그럼에도 이들 역시 공식 문서에는 ‘자의’로 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라르 훌리에 감독은 ‘경질’되고 말았다. 첼시가 맨유, 아스날과 더불어 ‘빅3’로 등장하면서 리버풀은 수많은 종마를 길러낸 명문 구단의 체면을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을 지배했던 라파엘 베니테스가 항구에 도착했다. 바로 직전 시즌에 발렌시아에 리그와 UEFA 우승컵을 선물한 노회한 청부업자와 더불어 구릿빛의 스페인 사나이들도 뒤이어 항구에 내렸다. 사비 알론소와 루이스 가르시아는 베니테스 감독의 기적을 위해 호출된 것이었다. 첼시의 무링요라면 이미 모든 선수와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근사한 코트를 고르는 데 좀더 집중해도 좋을 만큼 여유가 있었지만 베니테스가 도착한 항구 도시는 사정이 달랐다. 무링요처럼 퍼거슨과 벵거의 설전에 참여할 만한 여유도 없었다. 팬들의 넘쳐나는 기대에 비해 구단의 조건은 열악하였다. 이른바 팀 컬러 자체를 고쳐야 했는데 그 고쳐야 할 컬러라는 게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과연 이 리버풀이 저 70, 80년대에 세계 축구가 나아갈 바를 스스로 설정하여 가장 먼저 달려갔던 바로 그 리버풀인가.
베니테스는 우선 사비 알론소와 루이스 가르시아로 하여금 부상 병동을 오가는 제라드, 키월, 하만을 철저히 지원하도록 일렀다. 그렇게 간신히 04-05시즌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지난 봄, 국내 축구팬마저 새벽까지 밤잠을 설치며 함께 지켜보았던 리버풀 역사의 명승부. 지난 5월25일 터키 이스탄불. 흡사 ‘기적의 리버풀’이라는 영화를 찍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맞붙은 AC밀란에 먼저 3점을 내준 다음 연거푸 3점을 터트렸고 마침내 승부차기의 역전승을 이뤘다. 이 영화의 감독은 물론 베니테스인데 단지 이 결승전만으로 그가 행운의 감독으로 평가받아서는 곤란하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이 한수 배워야 할 피넌, 히피아, 캐러거, 트라오레의 황금 400은 우승후보 유벤투스의 화력을 처절하게 막아냈고 그 이상의 화력을 갖춘 첼시도 너끈히 막아냄으로써 이스탄불의 기적이 사실상 ‘기적의 연속극’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베니테스의 리버풀은 여전히 ‘공사 중’이다. 감독이 벤치에서 그린 도상학이 그라운드라는 냉엄한 현실에서 실천되려면 3년 정도는 필요한 상황. 게다가 수리 라인에 비하여 시세, 모리엔테스 등의 공격라인은 ‘빅3’에 비해 중량감이 떨어진다. 마이클 오언의 귀환도 여의치 않다. 저 70, 80년대 리버풀의 황금시대를 재현하기 위한 베니테스 감독의 설계도는 미완성이다. 그러나 발렌시아 시절의 리그 최소 실점이 말해주듯이 수비 안정화에 따른 공수 밸런스 조율이라는 베니테스의 밑그림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계약기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