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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길참견
김영하(소설가) 2005-09-09

아버지는 80년대 후반에 운전면허를 따셨다. 마이카 붐이 불어오던 시기였다. 온통 거리에 초보들이 넘쳐나던 시절. 당신도 중고차를 사서 거리의 초보 운전자 대열에 합류하셨다. 어머니를 태우고 강원도, 충청도 곳곳으로 신나게 돌아다니셨는데 가끔 논 한가운데로 부웅 날아가 사뿐히 안착하는 놀라운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셨다(깔고 앉은 벼값은 물론 물어주셔야만 했다).

어머니는 90년대 중반에 면허를 따셨다. 50대 중반의 일이었다. 어머니는 주차를 잘 못하셔서 가끔 쫙 뚫린 고속도로나 주행하시는 게 고작이었지만 지금도 운전에 있어서만은 아버지를 능가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신다.

동갑인 두분은 60대 후반이신데 이제 운전에는 완전히 흥미를 잃으셨다. “눈도 침침하고 생각대로 잘 되지도 않고 기름값도 많이 들고….” 그래서 공짜 경로표를 주는 지하철을 주로 이용하신다. 그러나 이 두분이 결코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길참견이다.

일단 이 두분은 자동차 뒷자리에 올라타는 순간부터 길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신다. 늘 다니는 길인데도 또 새로우신 듯, 두눈을 크게 뜨고 앞을 노려보신다. 마치 길을 잘못 들면 집안이 거덜나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이다.

“조 앞에서 좌회전이다.”

“아니야. 더 가서 좌회전해도 돼.”

“이 사람이!! 여기서 해야 된대두 그러네.”

“이 양반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하야, 더 가서 좌회전해야 신호를 잘 받는다.”

두분은 모든 길이 바둑판처럼 잘 구획되어 종횡으로 이어진 신도시에 사신다. 바로 좌회전을 해도 되고 그 다음에 해도 되고 아니면 한참을 더 가서 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곳이다. 어쩌면 아예 좌회전을 안 해도 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두분은 어디서 회전을 해야 좋은지를 두고 필사적으로 다툰다. 도저히 시끄러워서 운전이 안 될 정도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단 한번도 상대방의 지시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우회전하라고 하면 어머니는 언제나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그냥 가서 유턴하면 돼”). 거의 모든 교차로마다 이런 일이 재연된다. 어머니가 유턴하라면 아버지는 우회전해서 돌아가자고 말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상당한 수준의 공간지각력과 기억력, 운전능력의 소유자라 자부하는 내 의견은 거의 무시된다. 심지어 이 두분은 잘 모르는 동네에 가셔서도 굴함이 없다. 표지판을 보시면서 끊임없이 의견을 내놓으신다. 다른 일에는 거의 참견 같은 걸 안 하시는 분들이 오직 자동차만 타면 돌변하신다.

그런데 두분의 길참견은 드라마틱하게, 단 한방에 완전히 종식되었다. 거금 40만원을 들여 장만한 GPS 네비게이션 시스템 때문이었다. 이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논란의 여지없이 목적지에 정확히 인도하는 것을 여러 차례 목격하신 두분은 하는 수 없이, 저 하늘의 신을 닮은 이 정체불명의 기기에 그 좋아하는 길참견의 역할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300m 전방에서 우회전입니다.” “1km 전방에서 안전운전하십시오.”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네비게이션 시스템이 간들간들한 여성적 목소리로 길안내를 할 때마다 두분은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달싹이시려다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미국 군사위성이 (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조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알려주는 거예요.” 미국이라는 국호가 주는 중압감, 인공위성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신학적 뉘앙스, GPS라는 영문 이니셜의 이국적 권위가 합세하여 두분의 그 오랜 길참견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주말, 소래포구와 분당을 오가는 내내, 내가 운전하는 차의 실내는 어쩐지 꽤나 적막하였고 오직 네비게이션 시스템 속의 ‘똑똑한 고년’(우리 어머니의 표현)만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우리는 조용히 ‘고년’의 지시를 따라 집까지 무사히 당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