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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외출> [2] - 허진호 감독 인터뷰
사진 오계옥김혜리 2005-09-08

허진호 감독 인터뷰

“이번에는 직설법을 좀 써보고 싶었다”

-<외출>은 시작과 결말이라는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을 화면 밖 전화벨 사운드로 처리했다. 어떤 의도였나.

=원래 찍을 때는 그냥 이미지만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후반작업을 하면서 소리를 넣는 편이 이해를 쉽게 하지 않을까 싶었다.

-결말은 첫 구상대로인가.

=그렇다. 예전 영화들이 두 남녀가 헤어지는 느낌으로 끝났기에 <외출>은 그것이 해피 엔딩인지는 몰라도 둘을 만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가 김형경씨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외출>이 나왔다. 중견 문인이 정색하고 써내려간 영화소설이라니 독특하다. 마치 영화를 미리 보고 쓴 듯한 세부묘사가 있더라.

=조성우 음악감독의 회사 M&F에서 기획한 책이니까 편집본을 보셨을 수도 있다. 촬영현장에서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의견도 들었다. 서영이 좀더 강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욕을 하는 건 어떨까 등등.

-당신의 영화는 언제나 남자의 수기였고 여자는 그 눈에 비친 모호한 대상이었다. <외출>도 당초 인수의 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번에는 전작과 달리 인수보다 서영쪽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알 수 없는 대상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나 할까.

=초·중반까지 인수와 서영은 동일한 상황을 겪기 때문에 그것을 반복 교차시킬 필요가 없다고 봤다. 그래서 서영이 겪는 일은 영화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배우자들의 밀회 동영상을 보는 장면도 서영은 짧고 인수는 길다. 결과적으로 인수가 아내에게 가진 애정과 분노, 혼란이 영화에 일찍 무겁게 자리잡았고, 그 무게 때문에 후반으로 갈수록 인수는 능동적으로 무엇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에 갇혔다. 원래는 둘이 멀리 도망가는 이야기도 생각했다.

-시점의 주체가 흔들린다는 느낌은, 특히 서울로 떠나다가 다시 삼척 시내 카페로 돌아온 서영이 건너편 모텔방의 인수를 몰래 바라보는 장면 때문이다. 인수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관객은 서영의 시선을 공유한다. 멜로드라마에서는 관객은 언제나 더 많이 아는 자와 함께 슬퍼하지 않나. 어떻게 생각하면 <외출> 관객 중 다수를 차지할 아시아 여성관객 입장에서 서영과 동일시하고 인수를 욕망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도 같고.

=원래는 경호의 장례식 이후 둘이 만나는 신이 있었는데, 어쩐지 그 다음에는 둘이 만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인수와 서영이 각자 눈물 흘리는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문득 바라보는 느낌이 있었으면 싶어서 나온 장면이다. 촬영하면서 카페 내부가 지나치게 예뻐서 전체에서 겉돌 수 있을 거라는 감은 있었다.

-배용준씨가 인수가 비겁해 보인다고 불만을 표하진 않았는지.

=처음부터 그런 의견은 있었다. 후반부에서 인수가 능동적이기 힘든 상황에 몰리면서 나는 좀더 간접적이고 깊이있는 연기를 원했고, 배우로서는 뭔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표현을 원했던 것 같다. 그건 매번 내 영화의 배우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바람이다.

-거리에서 캔디바를 먹고 화분을 건네주는 서영의 행동이 전작의 여자들을 상기시킨다.

=커피로 할까 하드로 할까 했는데 손예진씨가 선택한 것이다. 그 장면의 옷색깔과 예쁘게 어울리라고 일부러 하늘색 하드로 고른 것 같다. (웃음) 선물을 화분으로 정한 건 봄의 느낌을 원했고 서영의 “죽이지 마세요”라는 대사가 재미있어서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슬픔을 구토, 코피, 불면 같은 육체적 징후를 통해 주로 표현했다. 현실적이면서도 진부해 보일 수 있는 위험이 있는데.

=그런 변화들이 일어났으면 했다. 실제로 몸이 힘겨울 만큼 어려운 경험이니까. 인수가 코피 흘리는 것을 예로 들면, 그는 공연 준비 중에 삼척으로 달려간 터라 일단 상경해 공연을 치러야 한다. 아내의 용태에 대한 근심에다가 불륜의 의심까지 덮치고 휴대폰 메시지 암호를 푸느라 밤을 샜다. 극단적인 피로다. 한편 많은 피를 흘린 아내를 향한 걱정이 피로 표현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외출>은 슬픔을, 인간이 스치고 부딪히는 현상을 통해 묘사하기보다 누군가의 울음이나 말로 토로하고 서술하는 방식이다. 특별히, 직설적인 화법에 대한 욕심이 있었나.

=직설법을 써보고 싶었다. 인수가 아내가 경호와 밀회하는 동영상을 보는 장면의 경우, 예전 같으면 인수가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카메라가 떨어져서 바라봤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워낙 본능적으로 멀어지려고 하니, 일부러 가까이 가자는 의지가 있었다. 이번에 해보니 남들이 왜 가까이 찍는지 알겠더라. 자세히 보이니까 재미있다. 동영상 보고 인수가 토하는 장면은 찍으면서 만들었다. 배용준씨에게 아내의 그런 모습을 본다면 어떨 것 같냐 물었더니 “속이 울렁거릴 것 같다”고 했고 나 역시 비슷한 상상이었다.

-인수와 서영의 관계가 결정적인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나.

=서영이 “일하는 여자가 매력있죠?”라고 묻자 인수가 “아니에요” 할 때의 두 사람 눈빛. 어, 둘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렇게 빨리 좋아하면 안 되는데, 그랬었다.

-<봄날은 간다>보다 컷이 얼마나 많았나.

=두배 정도, 350여컷이다. 길게 찍어서 많이 잘라냈다.

-음악을 전작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달리 말하면 음악에 많이 의지한 것 같다.

=카페 음악, 라이브 공연이 그런 느낌을 부추긴다. 베드신에도 처음에는 음악이 없었는데 들어가면서 좀 늘어났다. 콘서트 장면은, 인수의 일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나도 한번 사람 많이 나오는 장면을 찍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웃음)

-<밀회> <폴링 인 러브> <실락원> 등 불륜을 그린 영화에서는 기차역이 만남의 주요 공간이다. 그런데 <외출>은 삼척이라는 도시 전체가 그런 기차역의 확장 같다. 어떻게 보면 매우 인위적인 무대다.

=시나리오 쓸 때는 같은 병원에서 간병하는 사람이 숙소까지 같다는 우연이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헌팅하며 삼척에 가보니, 병원 바로 앞에 모텔이 있어서 장기체류 보호자들은 자연히 거기에서 투숙할 것이라고 그림이 그려졌고 그래서 편한 유혹에 넘어갔다. 지금은, 얼마간 떨어진 병원과 숙소를 오갔으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불륜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불륜 당사자가 되는 상황을 빌려 아이러니를 다뤄보겠다는 큰 목표가 있었다. 충분히 부각됐다고 보나.

=인수와 서영의 만남을 보는 감독의 시선부터 따뜻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호텔로 손잡고 들어서는 둘을 찍으면서 “둘은 이럴 수밖에 사랑할 수밖에 없어”라고 느끼는 한편으로 역시 긍정적으로 양해되는 사랑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역설은 서영이 화장실에 숨는 장면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촬영한 장소에 마침 거울이 있어서 두 사람의 반영이 나란히 보였다. 영화 전체적으로 어딘가에 비쳐 보이는 장면이 많다. 둘의 주관으로 느끼는 서정적인 면과 또 다른 시선에 비친 ‘불륜’의 모습. 두 가지를 함께 가고 싶었다.

-영화의 결론이 봄에 내리는 눈, 일종의 기상이변이다. 이건 무슨 뜻인가. 계절과 날씨의 작용과 인물이 그리는 궤적이 <꽃피는 봄이 오면>을 연상시킨다.

=그 영화를 좋아한다. 봄의 폭설은 하나의 판타지라고 해도 좋다. 이런 고민이었다. 어떤 행복한 느낌을 주고 싶은데, 둘이 정말 행복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경호의 죽음으로 둘의 관계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고, 서로 만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그런데도 나는 둘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변’, 즉 판타지가 들어갔다.

- <외출>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었나.

=인물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것은, 단순히 기술적인 카메라의 쓰임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표정과 눈동자를 스크린으로 보여주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좀더 대중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다. 그러나 그런 방향이 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아니다.

-“좀더 대중적”이라고 말했는데, 전작들이 난해했거나 충분히 많은 관객이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대중적’이란 더 이해하기 쉬운 방식이라는 뜻이다. 물론 나의 영화에는 대중적 한계가 있었다. 어쨌거나 약 180컷의 긴 호흡으로 간 영화들이었다. 어느 감독이나 마찬가지로 내게도 시장의 압박과 부담은 크다. <봄날은 간다>도 해외투자가 없었다면 큰 손해를 봤을 거다. 만약 <외출>이 대중적이지 않다면, 카메라가 인물에 가까이 가면서 거리를 둬서 담을 수 있는 어떤 객관성들을 버리고 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음 영화로 예정된 <행복>은 어떤 영화이며 언제 제작에 들어가는가. <외출>과는 어떤 선으로 연결될 영화인가.

=<행복>도 <외출>도 내가 대상에 좀더 가까이 가고 싶은 욕구가 먼저였고, 그에 따라 구상한 영화들이다. <외출> 전부터 준비했던 <행복>은 내년 초 들어갈 것 같다. 준비는 많이 했는데 다 까먹었다. 새롭게 <행복>을 만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밖에 생각 중인 또 한편의 영화가 있는데 특정 장르에 속하진 않는다.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하기도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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