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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샤오밍 감독의 <비탄의 섬>
2001-07-26

과거로부터 온 여인

1995년, 감독 슈샤오밍 출연 비키 웨이 7월28일(토) 밤 10시10분

영화 <비탄의 섬>에서 제목의 의미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대만이라는 공간의 역설적인 상황을 논하고 있는 거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대만 뉴웨이브 감독들은 비슷한 주제를 영화로 만들곤 했다.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 대만감독들은 그들 역사의 멍들고 아픈 부분을 영화화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들은 특히 도시를 배경으로 전통과 근대화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을 담길 선호했는데 대만영화에서 ‘도회영화’라는 범주를 이룰 만큼 일관된 흐름을 이룬 바 있다. 슈샤오밍 역시 대만 뉴웨이브의 일원으로 불리는 감독. 허우샤오시엔 밑에서 연출공부를 한 이력답게 그의 영화에선 선배감독의 영향이 짙게 배어난다. 단아한 형식미와 절제된 듯하면서 인물 내면의 풍경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미장센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를 빼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슈샤오밍 감독이 아류감독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느 평자는 감독에 대해 “대만 뉴웨이브 감독 중에서 가장 과격한 내용을 추구하면서 드라마의 틀을 해체한 연출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비탄의 섬>은 당시 칸영화제 초청작이기도 했다.

<비탄의 섬>은 대만 현대사를 바탕에 깔면서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띤다. 영화에서 린링은 반정부 테러행위로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석방된 인물. 애인이자 한때 스승이었던 안롱의 권유로 폭탄테러를 하다가 10년형을 살고 감옥에서 풀려난다. 출감한 린링은 안롱을 포함한 동지들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무기력한 삶을 보내고 있는 것. 안롱이 다른 여성과 결혼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모습에 린링은 배신감마저 느낀다. 슈샤오밍 감독은 즉흥성을 발휘해 감각적인 화면을 빚어낸다. 관조적이면서 정적인 카메라로 인물들 상태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어둡고 눅눅한 기운으로 가득 찬 대만 풍경을 뒤로 하면서 <비탄의 섬>은 배신과 복수의 드라마를 엮어간다. 린링은 친구와 동료들이 차례로 등을 돌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이제 지난 일은 잊으라”고 말하고 “넌 과거와는 달라져야 해”라며 충고한다. 린링은 그런 언급을 감당하기 버겁다. 감독은 이 여성이 심리적으로 겪는 갈등을 무척 우아한 화면들로 포장하고 있는데 캐릭터의 감정을 이미지 몇컷으로 여과없이 담아내고 있다. 예쁘게 정돈된 사진집을 보는 듯한 영화 장면은 수려하기 이를 데 없다. 여기서 슈샤오밍 감독은 허우샤오시엔보다 세련된 스타일이나 ‘닫힌’ 내러티브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비탄의 섬>은 차츰 뻔한 결말로 향한다. 여인은 한풀이를 위해 아기를 유괴하고, 개인의 넋두리를 주변인에게 털어놓는다. 개인적인 복수극에 치중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놀라운 대목이 눈에 띈다. 감독은 과격한 이미지와 생생한 사운드를 병치함으로써 대만사회의 폭력성을 스크린에 풀어놓는다. 때론 록음악이 역사의 골목길에서 혼란을 겪는 여성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슈샤오밍 감독은 <비탄의 섬>을 대만 현대사의 굴절된 순간을 포착하는, 느리고 덤덤한 리듬의 영화로 만들어낸다. 에드워드 양 같은 독창적 스타일이나 허우샤오시엔에 버금가는 형식적인 완결성은 없어보이지만 <비탄의 섬>은, 다른 감독들 작품에 부재하는 깊은 ‘비장미’를 품고 있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sozin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