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토박이인 이구영은 배재학당을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충무로에 뛰어든 골수 영화인이다. 시나리오 데뷔작은 김영환의 연출로 완성된 무성영화 <장화홍련전>. 당시 단성사 주인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프로듀서로 손꼽히는 박승필이 제작한 작품인데, 배우와 스탭 모두 한국인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극영화로 꼽힌다. 한국영화 기술스탭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필우가 촬영, 편집, 녹음, 현상을 도맡아서 한 작품이다. 이듬해 이구영은 <쌍옥루> 전후편으로 감독 데뷔식을 치름과 동시에 한국 최초의 연기전문학교인 조선배우학교를 설립한다. <낙화유수>에서 주연으로 기용된 복혜숙, 이원용, 정암 등이 모두 이 학교 출신 배우들이다. 진주를 무대로 기생과 화가의 애달픈 사랑을 그린 <낙화유수>는 한국 최초의 영화주제가 <강남달>로도 유명한데, 1929년 컬럼비아레코드에서 출시된 <낙화유수>를 부른 가수는 바로 이구영의 동생 이정숙이었다.
나운규가 남긴 민족영화의 대명사 <아리랑>의 속편에 해당하는 <아리랑 그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서로 상치되는 기록들이 분분하다. 전편에서 감옥으로 끌려갔던 영진이 출옥 뒤 다시 살인을 저지르고 끌려가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는 기록도 있고, 출옥한 영진이 결국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길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는 증언도 있다. 심지어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의 저자인 정종화는 이 영화의 감독을 나운규로 추정하기도 한다. 어찌됐건 흥행은 전편에 비해 크게 저조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인연을 맺은 윤봉춘은 훗날 그의 가장 든든한 영화적 동지가 된다. <승방비곡>은 최독견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이복남매였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는 내용의 신파극. 이 영화에서 조연을 맡았던 윤봉춘은 1958년 리메이크작에서 감독을 맡는데, 이때 기용한 배우는 이룡과 엄앵란이었다.
훗날 월북하여 북한의 인민공훈배우로 칭송받게 된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은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로 기록된다. 감독을 맡은 이명우는 <아리랑 그후 이야기> 이후 줄곧 카메라를 잡아온 촬영감독 출신인데, 위에서 언급한 이필우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시 평균 제작비의 3배가 넘는 거금 1만원을 들여서 찍은 대신 평균 입장료의 2배인 1원을 받고 개봉했는데 결과는 엄청난 대박이었다. 이구영이 그려간 승승장구의 필모그래피는 그러나 일제 말기로 접어들자 그 맥이 끊긴다. 상당수 영화인들이 어용친일영화의 제작 일선으로 끌려갔던 것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해방 이후 이구영은 오직 ‘지사감독’으로 불리던 윤봉춘만을 위하여 시나리오를 쓴다. 이른바 ‘광복영화’ 혹은 ‘계몽영화’로 불리던 <삼일혁명기> <유관순> 등은 비록 16mm로 제작되었지만 대중으로부터 격정적인 갈채를 받았다. 한국전쟁 동안 만들어진 <성불사>는 일종의 참전독려영화로서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충무로 작가의 비조 이구영의 존재가 한국영화사의 축복이라면, 그의 작품들을 소문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영화사의 저주다.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
시나리오 필모그래피
1924년 김영환의 <장화홍련전>
1925년 이구영의 <쌍옥루>(전후편)
1927년 이구영의 <낙화유수> ★
1930년 이구영의 <아리랑 그후 이야기>, 이구영의 <승방비곡> ★
1931년 김상진의 <방아타령>
1935년 이명우의 <춘향전>
1947년 윤봉춘의 <삼일혁명기>
1948년 윤봉춘의 <유관순>
1949년 윤봉춘의 <애국자의 아들>
1952년 윤봉춘의 <성불사> ★
1954년 윤봉춘의 <고향의 노래>
★는 자(타)선 대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