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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내 실수의 연대기
이영진 2005-08-26

수습 시절. <춘향뎐> 개봉을 앞두고 민언옥 미술감독을 만났다. 어리버리 초보티 안 내려고 다소 거만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때 이미 30대 중반의 마스크를 갖고 있어서, 목소리를 깔아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30분쯤 지나, 잠깐 상대가 자리를 비운 사이 녹음기를 확인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다. 무릎 위에 올려뒀던 수첩은 깨끗했고, 내 머릿속도 깨끗했다. 어떻게 위기를 넘길까, 머리가 아파왔다. 모든 걸 털어놓기에는 너무 쪽팔렸다. 일단, 말을 돌려 다시 물었다. 그러나 상대가 바보인가. 했던 질문 또 하자 “아까 물어봤잖아요?”라고 했다. “음….”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고, 기사를 쓰면서 십년 감수했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주일 뒤. 민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기사 잘 봤다는 연락인가. 아니었다. “이름을 바꿔야 할까봐요. 연옥이 더 좋긴 하네요.” 책을 들춰보니 민언옥이 아니라 민연옥이라고 되어 있었다.

실수가 혼자 싸안고 가는 봇짐이면 좋으련만. 차승재 대표가 직접 편집장에게 전화한 일도 있었다. ‘매니지먼트 전쟁시대’라는 제하의 기사였는데, 싸이더스를 졸지에 제작시스템이 전무한 영화사로 만들어 버렸다. 당시 편집장은 애초 올려놓은 기사를 보더니 싸움을 좀더 붙여보라고 했다. 보충 취재를 했고, 기사를 이리저리 난도질해서 바꿨다. 기사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과정에서 “제작시스템이 전무한 싸이더스는∼. 반면 제작시스템이 갖춰진 백기획 등은∼”이라고 실제와 반대로 썼다. 얼마 뒤, 편집장이 다가와 차승재 대표로부터 항의를 받았다고 했다. “영진, 왜 그랬니?” 이내 본인이 다그쳐서 그런 것이라고 편집장은 스스로 채찍질했지만, “내 탓이다”라며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는 부모를 보는 자식의 심정도 편하진 않았다.

첫 실수를 한 지 6년이 지났다. 그동안 기사로 저지른 만행을 일일이 늘어놓으려면 지면이 남아날까. 안 남아날 것이다. 내일쯤이면 아마도 회사 한쪽 벽에 ‘이영진. 제작사고. 10% 감봉’이라는 내용의 공고가 나붙을 게다. 얼마 전 대형사고를 쳤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별로 없겠지만, <씨네21>이 생기기 전부터 좋아했던 박광수 감독을 만난다는 생각에 전날 밤잠을 설쳤다. 다행히 말수가 없다는 그를 만나 3시간 동안 기대 이상의 즐거운 담소를 나눴고,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러나, 아뿔싸, 잊지도 않는다, 7월15일. 기획회의를 하던 와중 아이필름에서 전화 한통이 왔다. <씨네21> 512호 목록을 인터넷으로 미리 확인해보았는데 박광수 감독의 신작 이름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영화사쪽에선 인터넷 목록 수정과 함께 잡지에도 영화제목이 잘못 기재된 것은 아닌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직접 교정지를 확인한 순간, 또 한번 머리가 뒤죽박죽이 됐다. 아니나다를까, 해당 인터뷰 기사에 영화제목을 한차례 잘못 썼음을 확인한 것이다. 내 한달 월급보다 많은 300만원을 들여 새로 인쇄를 해야 하다니. 잠시 저어했지만, 바로잡습니다 코너에 <컨테이너의 남자>(가제)가 <콘크리트의 남자>로 잘못 나갔습니다, 라고 쓰는 것도 지나치게 우스웠다.

가끔 선배들은 나보고 ‘어이, 이 감봉’ 한다. 대감이나 참판이면 얼마나 좋으랴. 입사한 지 2천일을 훌쩍 넘기고서 처음 경위서를 쓰면서, 기자로서의 기본을 다시 생각한다. 내일부터는 후배들을 옥상으로 불러모아 ‘기자란 말이지’라고 거만을 더이상 떨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 마(魔)가 씌우면 골백번 다시 봐도 실수를 고칠 수 없다지만, 그건 변명일 뿐이다. 요만큼의 실수가 있어 엄청난 사태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위하고, 또 자위하는 지금, 드럽게 더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