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벼는 광합성으로 생산한 에너지 가운데 80% 이상을 자신을 위해 쓴다. 20% 정도만 생식을 위해, 쉽게 말해 볍씨에다가 투여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인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낸 ‘기적의 벼’는 자기가 생산한 에너지의 80%를 볍씨에다 투여한다. 벼를 수확하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야생벼보다 무려 4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녹색혁명의 찬사 속에서 몇몇 가난한 나라에서 이 종자를 얻어다 논에 심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왜냐하면 이 벼는 에너지의 80%를 볍씨에 투여하기 때문에 그걸 버텨줄 줄기는 약하기 짝이 없고, 유기물을 흡수하고 에너지를 생산할 뿌리나 잎이 빈약하며, 더구나 세균이나 벌레에 대해 대항할 능력이 너무도 취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벼를 제대로 키우려면 비료를 잔뜩 뿌려주고, 농약을 빈번히 쳐주어야 한다. 와중에 큰 바람이라도 한번 불면 줄기는 부러져 논에 쓰러지고 만다.
마르크스가 생산력이란 개념을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라고 정의했을 때, 이런 식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그 생산력이라는 말을 쉽게 ‘생산성’이란 말로 이해한다. 이 경우 생산력 발전이란 생산성이 증가하는 것이다. 벼의 소출이 새로운 종자를 통해 4배로 늘어난 것이 그것이다. 생산성이란 투입량분의 산출량으로 계산하니, 추가비용이 없다고 하면 생산성은 400% 증가한 것이 분명하다. 뭐, 비료나 농약값을 계산해도 최소한 200∼300% 정도는 증가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계산, 이런 식의 생산성 개념이 놓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새 종자를 통해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가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점이다. 벼는 모든 에너지를 자식새끼 만드는 데 투자해서, 자기 힘만으론 자기 몸 하나도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빈약한 신체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간은 농약이나 비료 같은 화학약품들을 열심히 뿌려야 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땅과 물은 화학적으로 오염되었고, 그 결과 개구리나 미꾸라지도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등등의 사실들 말이다. 이게 바로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 아닌가!
다른 건 접어두고 벼와 인간만 보더라도, 인간은 자신이 거둘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벼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까지 착취한 것이다. 아니, 이런 목적으로 ‘씨’를 바꾸고 종자를 바꿔버린 것이다. 볍씨만은 아니다. 돌아다니던 말이나 소를 잡아 키우는 것으론 부족해서, 살빠지지 말라고 좁은 우리에 가둬두곤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투여하는, 좀더 생산적인 방법들이 어디서나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병아리는 2개월이 아니라 보름이면 다 큰 닭이 된다. 4배의 생산성을 얻은 것이다! 도끼나 톱 대신에 기계톱과 포클레인 등을 동원하면 빨리 베는 속도만큼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다. 그 속도만큼 빨리 숲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생산력이란 개념을 생산성이란 말로 대체하고, 자연과 인간간의 관계를 투입량과 산출량의 비율로 대체했을 때, 이 모든 사태는 그저 ‘생산성 증가’, ‘생산력 발전’으로만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그 이전의 봉건제에서나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저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인 게 된다. 그 경우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혁명이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은 좀더 높은 생산성으로 자연을 착취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산력이 생산을 위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라면, 혹은 자연 안에서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라면,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케 하려는 자본주의 사회와 상생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코뮌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양적인 차이만 가질 뿐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는 자본주의적인 생산력(자연-인간 관계)이 있다면, 코뮌주의에는 거기에 걸맞은 생산력(자연-인간 관계)이 따로 있는 거라고, 아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좀더 빠른 속도로, 좀더 높은 효율로 희생시키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공생과 상생을 위해 인간이 적어도 조정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생산력의 발전이란 이처럼 공생하며 함께 생산하는 능력의 발전, 그런 능력의 성숙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