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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연필을 든 무사, 김훈 [2]

결핍 없이는 세상을 알 수 없다

남재일 글을 읽을 때마다 두 가지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개별적인 대상을 냉혹하게 응시하는 시선이 하나고, 나머지는 대상을 모르는 아주 맹목적이고 강한 그리움 같은 것입니다. 저는 이 그리움의 지향 혹은 정체가 뭘까 궁금합니다.

김훈 그건 아마 결핍일 겁니다. 누구는 남자로 태어나고 누구는 여자로 태어나잖아요? 나는 남자로 태어나서 마초 소리를 듣고 사는데, 근데 그 마초라는 것이 그 남자가 갖고 있는 결핍을 말해요. 자기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이 숙명적인 결핍이고 그 결핍의 힘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해나가는 거지. 내가 충만하고 결핍되지 않고 아무런 그리움이 없는 자라면 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을 거잖아요. 그건 결핍의 힘이야. 헌데 결핍은 ‘경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뭘 결여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지. 사실. 여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어. 본래 그 무엇이 결핍된 채 태어나지 않나. 그런 것들이 아마 세계를 이해하는 내 감성의 기초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개>를 쓸 때 생각한 건 인간과 세계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거예요. 미디어, 책, 관념, 상징, 추상, 언어 이런 것들을 몽땅 걷어내버리고 존재와 세계를 직접 맞부딪치게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처음에는 사람으로 설정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개로 바꾸었어요. 전략적인 후퇴이고 교활한 탈바꿈이죠. 사람으로는 도저히 승부가 안 나니까 사람이 가장 무책임하게 진술할 수 있는 게 개잖아. 개의 내면에 대해서는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으니까. 개로 바꾼 것은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내 자신의 절망감 같은 것이지.

남재일 싫어하는 것들이 뭔지는 알겠습니다. 뭔가 그리워한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사랑하는 것이 무언인지는 작품에 거의 잘 나오거든요......

김훈 자전거, 연장, 공구, 등산 장비를 좋아하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흠 이게 지금 영화잡지잖아, 영화야. 영화관에 가본 적이 거의 없어요. 영화가 싫어서 안 가는 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물론 싫지만 그보다 더 싫은 것이 영화관이라는 공간이야. 들어가면 컴컴한데 수백 명이 앉아서 이놈 저놈 냄새 막 나고 그런 공간을 문 열고 들어가기가 나로선 불가능해. 난 놀 때는 꼭 강가로 들로 나가서 혼자서 뛰어놀거나 자전거 타고 놀아요. 기운이 없을 때는 바람 불고 물 흐르는 데 가서 멍청하게 앉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영화에 미쳐가지고 영화라면 항상 신바람이 나 있어. 딸아이가 영화 찍는다고 해서, 돈을 1000만원을 줬거든. 10분짜리 만드는데 그렇게 든대. 현장에 오라고 해서 가봤더니 한 놈이 막대기에 걸레 같은 걸 달아서 들고 있더라고. 그게 마이크래. 그놈이 만든 영화를 봤어. 제목이 ‘일상에 대한 구토’야. 거기 나오는 아빠가 일상에 매몰돼가지고 머리맡에 담배꽁초가 가득한 재떨이가 있고 관념과 추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 자막에 ‘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뜨더라고. 돈 받아다가 지들끼리 논 거야. 신바람이 나니까. 그리고 영상이 나오잖아. 소설은 영상이 안 나오지. 친구놈들 봐도 인문적 소양이 없어. 저런 놈들이 어떻게 뭘 만드나. 신뢰가 안 가. 대학에서 배운 게 해체주의래. 탈근대, 포스트모던 해체주의, 그런 게 다 뭐냐 그랬더니 가족을 해체하고 정치제도를 해체해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그래. 가족을 해체한다면서 1000만원은 왜 나한테 달래?

몸에 대한 신비감, 생명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운 일

남재일 혹시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은 보셨습니까?

김훈 나는 드라마 안 봐요. 딱 하나 본 것이 이덕화 나온 거, <제5공화국>.

남재일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조금 뚱뚱한 여자가 나와서 바른 말 해갖고 굉장히 인기가 있었거든요? 요즘은 몸이 지대한 관심사인데, 그건 어떻게 보십니까?

김훈 난 젊었을 때 사람의 몸에 대한 신비감을 느꼈어요. 양감이나 조각적 아름다움보다 인간의 몸이 살아서 밭에서 기계적으로 작동하고 노동하는 것을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부학책도 많이 봤고.... 근데 그런 해부학적 사실보다 살아 있는 생명이 작동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었어요. ‘본다’는 행위를 예를 들면, 안구를 분석해도 ‘본다’는 것이 검증되는 게 아니야. ‘본다’란 인간의 몸과 마음이 총체적으로 작동되는 종합적인 행위인 것이죠. 몸놀림이 다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몸이 자꾸 물신화, 대상화 되잖아요. 그건 노예가 되는 거죠. 시각의 노예.

남재일 <개>를 보면 몸을 묘사할 때 ‘똥구멍’이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몸 중에서도 하필 그걸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상기시키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훈 인간의 추악한 성질 속에서 아름다움을 입증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의무겠죠. 인간이 인간인 이상 아름답다는 것을 입증할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것은 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추악함과 더러움과 생존경쟁, 약육강식의 질서 먹이다툼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재일 살면서 어떤 유형의 인간을 아름답다고 느꼈습니까?

김훈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지. 인간은 반드시 더럽혀지게 돼 있으니까. 더럽혀지지 않아 보이는 아름다움을 보면 신뢰가 가지 않죠. 살아 있다는 건 더러운 세계와 타협하고 흥정했다는 거니까.

다시는 젊어지고 싶지 않다

남재일 장편 소설을 쓰는 도중에 띄엄띄엄 단편도 쓰시는 것 같은데. 왜 쓰는지 잘 이해가 안 돼요. 장편의 밑그림 같은 건가요? 아님 그냥 청탁 때문에 쓰는 건가요?

김훈 난 모든 청탁을 안 받아요. 단편을 하나 쓰면 갖고 가서 사정해서 내달라고 해요. 단편은 일단 돈이 안 되고 작가의 바탕이 백일하에 드러나. 이게 어떤 놈인지 밑천이 다 드러나버려. 수다도 떨 수 없고 필요한 딱 그 말만 해야 하는 거야. 그 안에서 완결된 세계를 만들어내야 하니 진땀 나는 일이지. 올해는 단편을 서너 편 써보려 했는데..... 지금 전망이 매우 나빠요.

남재일 지금까지 주로 여행기를 많이 썼는데 어떤 독자는 소설보다 산문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산문 쪽에서 새롭게 써보고 싶은 영역은 없습니까?

김훈 산문은 노인의 장르인 거 같아. 산전수전 겪고 세상이나 풍경의 깊이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완숙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장르인 거지. 굉장히 무서운 거죠. 함부로 덤빌 일이 아닌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뭘 모르고 쓴 것도 있고.

남재일 남의 책은 잘 읽는 편인가요?

김훈 자랄 때는 공자를 많이 읽었어요. 공자는 자기 삶을 과장한 적이 없고 분명한 말만 해요. 삶에 대한 태도가 아주 경건하고 겸손하죠. 나는 노자는 좋아하지 않아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요. 동아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은 공자예요. 까불지 않는 사람. 까불면 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사람. 요새 우리 젊은 작가들이 쓴 건 잘 안 봐요. 아무런 감흥이나 공감을 느낄 수가 없어요. 사이버 공간에서 장난하는 것 같아.

남재일 언어와 현실의 거리가 안 느껴진다는 건가요?

김훈 살아 있는 인간의 삶과 하등의 사소한 관련도 없는 사이버 공간의 장난 같은 느낌이 들어. 문체 자체가 판타지가 돼 있더구만. 사랑에 빠지니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입자가 보랏빛이었다고 썼더구만. 이런! 망할 자식이 있나. 근데 그런 인간들이 무수해요. 나는 젊은 애들을 보면 그 나이를 지나온 게 정말 다행스러워. ‘저런 황당무계하고 무지몽매하고 동서남북 상하좌우 모르는 그 시절을 나는 그래도 지나왔구나’ 하는 게 참 다행스럽고 다시는 젊어지고 싶지가 않아요. 꼭 군대에서 제대한 것 같아요. 젊은 애들은 인간의 당위와 현실은 층위가 다르고 작동방식이 다른 건데 그에 대해 무지하거나 알더라도 일부러 부인해. 이념이나 가치가 인간의 현실을 일사불란하게 이끌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 놈들이 있어요. 그런 애들은 그래도 나은 놈들이에요. 그것도 없이 맹탕 날라리만 하는 놈들도 있잖아요. 어쩌면 그런 것이 ‘청춘은 아름다워라‘는 명제에 속하는 사태일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 그래서 청춘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몽매함이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인간의 진보적 가치건 자유이건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요. 물적 토대를 상실하면 그 순간에 우리는 모든 가치를 상실하는 거예요. 그건 젊은이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세계의 조건인 것이죠.

남재일 몸이라는 물적 토대가 나이가 들면 변화하는데, 젊을 때는 그것에 휘둘리거나 실수하기도 하잖습니까. 젊었을 때는 몸의 욕망이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나이에 따라 사고의 변화가 심한데 그런 변화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김훈 젊었을 때 내 꿈은 밥을 먹는 것이었어요. 신문사에 들어간 것도 목구멍에 풀칠하려고 한 거고. 그런데 어떤 놈들은 사회의 목탁이 되기 위해 들어왔다고 그러대. 저런 황당한 자식들이 있나 했지.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대학 갓 졸업한 놈이 사회의 목탁이 될 리가 없잖아. 어림없는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러면서 자기가 사회의 목탁이라고 다니는 거야. 난 그런 태도를 정말 경멸했어요.

그 빌어먹을 놈의 연애, 외로움

남재일 연애나 사랑에 대해 거의 안 쓰시지 않습니까. 원래 경험이 없어서 안 쓰는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나이 들어보니 그것들이 웃겨서인가요?

김훈 난 스물네 살에 조혼을 했고,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동이 애인이 될 수밖에 없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사는 게 공허하다고들 느끼면 그걸 다 연애로 해결하려 들어. 온 나라가 연애중독에 걸린 거 같아. 그 빌어먹을 놈의 연애, 아이고.... 일부일처제라는 것이 야만 제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승복할 수 없지만 부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문명 전체가 부서지는 거니까. 일부일처제는 지금 사실 형해만 남았지. 그럴수록 인간은 그 형해를 강화하겠죠. 삶은 공허해지고 연애는 탈출구처럼 유혹할 거고.....어쩔수 없는 거죠. 연애.

남재일 개인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통 언급이 없으시네요.

김훈 나는 개인적인 연애나 치정의 경험이 없어요. 어찌 보면 불구자지. 나는 남자가 좋았어요. 군대가니까 좋더라고. 남자들이 수북이 모여서 서로 욕하고 싸움하고 상소리하고 아무 데나 주저앉고. 아무거나 집어먹고. 육군졸병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책임질 일이 없잖아, 욕이나 하고 주는 대로 먹고 훈련하고 땀냄새 나는 게 좋았어요.

남재일 기자 생활에 견주어 작가 생활은 어떤 가요? 일상적인 생활의 패턴은 어떻습니까?

김훈 주로 놀죠. 하루 세 시간 이상 일을 못해요. 자전거 타고 나가거나, 한강 하구 쪽으로 가서 들에서 놀아요. 저녁 때 술 먹고. 운동량은 많은 편이죠. 요새는 비가 와서 못 나갔는데, 심심풀이로 나가면 70~80킬로는 갔다오고 맘먹으면 200킬로도 가고.

남재일 혼자 시간을 잘 보내시네요. 외로움을 별로 안 타시는 건가요?

김훈 외로움? 난 그게 뭔지를 모르겠어. (좌중 폭소) 어떤 놈이 ‘외롭다‘고 써놓으면 뭔지를 모르겠어. 무슨 심적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나? 사전을 찾아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적적한 것이다‘라고 돼 있더만.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내 느낌은 존엄함과 충만감이지. 외롭다는 것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어. 연애하는 애들 글을 보면 연애하는 핑계가 백이면 백 외로움이더구만. 그게 뭔 호들갑인지 모르겠더라고. 혼자 가만히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자신감 속에서 그게 편안하지가 않은 모양이야. 술 먹으면 꼭 전화질 하는 놈들이 있어요. 외롭다고.

인간의 몸은 글쓰기의 대상일 뿐 탐닉하지 않는다

남재일 그런데 사람 가까이 있지 않으면 냄새를 맡거나 만져보기는 어렵지 않나요? 그런 부분이 육체로 밀고나가는 김훈의 글쓰기와 어떻게 나란히 이해돼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김훈 인간의 관능이나 몸의 냄새, 육감에 대해 글을 많이 썼지만 나는 인간의 살을 혐오해요. 혼자 있는 게 좋아요. 내가 그걸 탐닉해서 쓰는 게 아니에요. 다만 글쓰기의 대상일 뿐이지. 난 인간 존재가 들러붙어 있는 것보다 뚝뚝 떨어져 있는 게 보기 좋아요. 멀찍이 하나씩 있는 게.

남재일 다음 장편소설 계획 중인 것이 있습니까?

김훈 내가 뭘 써야 할지는 명확한 걸 갖고 있어요. 근데 그 언어가 부려 먹혀지지가 않으니까 할 수 없는 거죠. 어디로 가야 될지 선명한 그림이 있는데, 그리로 갈 수가 없는 거야. 말(言)을 이끌고 그리로 가야 하는데.

남재일 대충 그림이라도 그려 보여주실 수 있나요?

김훈 당대의 꼴을 그려보려고 해요. 내가 기자로 살아온 30년의 세월을 꼭 한 번 써볼 거예요. 작가는 체험이 많아야 된다고들 하는데, 체험이라는 게 다 소설의 소재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나는 나의 이른바 체험이라는 걸 한 번도 쓴 적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을 관찰한 시간을 말하자면 나처럼 많은 경험을 가진 작가는 대한민국에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적절히 취사해서 ‘당대꼴’을 써보려고 하는데 될지 안 될지 모르겠어요.

남재일 상당히 사이즈가 큰 소설이 될 것 같네요.

김훈 그렇죠, 상당히 큰 이야기가 되겠죠.

작업실을 나와 맥주 마시며 나눈 얘기 중에 재미있는 얘기가 많았지만 술자리 토크는 생략해달라는 요청 때문에 옮기지 못했다. 그 중 온건한 얘기 몇 마디를 톤을 낮춰 옮겨볼까 하다가 생략했다. 불화를 불화로 내버려두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새로운 불화를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김훈은 여전히 연필로 글을 쓰고, 자전거를 타고, TV를 끄고, 극장을 피해 다니고, 여자를 풍경으로 관조하지만 몇 년 전에 비해 확실히 달라진 인상 하나를 받았는데, 그건 나이듦이었다. 영화를 만드는 딸 얘기를 할 때 그는 신랄한 어투였지만 표정은 무장해제돼 있었고, 미소를 다 감추진 않았다. 그의 문장 혹은 삶의 문체는 여전히 연인보다 자식보다 운명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에서 무엇이 나올지 아마 그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 그 속살의 쑥스러움을 가리기 위해 그는 개의 외투를 꼭꼭 둘러야 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