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명멸하는 불꽃>
이승훈( PD) 2000-01-11

‘내 인생의 영화’라! 내 인생에서 가장 재밌게 본 영화? 아니면, 내 인생을 바꾼 영화? 그것도 아니면 내 인생과 영화에 대해? 그건 더 아닌 것 같은데.....

여하튼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영화와 내가 인연을 맺은 게 언제였던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곤 내 인생에 영화가 중요하게 개입하기 시작한 지난 6년, 즉 ‘시네마천국’과 함께 한 시간을 집중적으로 되돌아보기로 했다. 그러면 어떤 식이든 답이 나올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이 세상엔 영화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영화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있는 영화들이란 실제로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가? 우리 사회에 오래 전부터 만연해 있는 문화적 편식, 그 중에서도 영화는 더욱 심하다. 어쩌면 오락적인 문화와는 체질적으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더더욱 영화와는 일찍부터 인연을 맺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네마천국’과 함께 한 6년의 시간 동안 다소나마 영화의 편식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꽤나 고맙고 행복했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거장들의 영화를 볼 수 있었고, 또 이전에 보아왔던 영화들이 얼마나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시각을 강요했던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물론 몇년전에 비하면 제한적이었던 공간도 편협했던 시각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심각한 문화적 편식에 시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순 없다. 사실 ‘거짓말’이나 ‘둘하나 섹스’의 등급심의를 비롯한 일련의 과정(굳이 표현의 자유을 운하지 않더라도)을 통해 보여지는 우리 사회의 문화 스펙트럼의 부재는 이 땅을 살맛나지 않는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이 영화 역시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편식 때문에 널리 알려질 수 없는 감독의 널리 알려지지 못한 작품이다. 지난해 아는 사람만 알 정도로 잠깐 개봉했던 <레이닝 스톤>이나 몇년전 개봉 자체가 화제가 되었던 영국의 좌파 감독 켄 로치의 47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명멸하는 불꽃>은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더더욱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한때 방송PD가 되고픈 이유가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던 내게 잠시 잊었던 다큐멘터리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한 <명멸하는 불꽃>은 1995년 9월부터 1년 넘게 지속된 영국 리버풀 항만노동자들의 복직투쟁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영화가 완성된 1997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최초의 발단단계에서부터 집회, 노조원들의 회의, 인터뷰 등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보여준다. 특별히 눈에 띄는 촬영이나 뛰어난 편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어떤 주장을 강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저 카메라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따라가고, 노동자들과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간혹 내레이션이 들려오지만 해설자는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감독은 분명히 해고된 항만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지만, 결코 감독의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자연스럽게 판단할 수 있는, 아니 판단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해고자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곳곳에 장치를 해둔다.

흔히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반대되는 입장을 보여줄 땐 공평해야 한다고 한다(특히 방송에선). 그러나 그런 원칙을 <명멸하는 불꽃>에선 결코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해고노동자들과 그 반대편에 있는 고용주(고용주는 인터뷰를 거절해서 공장의 롱 쇼트를 보여주며 전화음성을 들려준다), 그리고 해고노동자들이 찾아다니면서 만나는 국회의원(정권만 잡으면...이라고 말하는), 운송노련 비서관 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전달방식은 정형화된 인터뷰보다 말하는 이의 의도를 훨씬 더 정확히 보여주고, 따라서 객관적인 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해고노동자의 이야기를 비롯해 그들과 관련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을 통해 보여주며, 특별한 해설을 가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과연 누가 위선과 가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는지를 관객이 자연스럽게 알게 한다. 이러한 방식은 상세한 해설과 강한 입장표명으로 자칫 보는 이를 무시(!)할 수도 있는 우를 철저히 비켜 간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50여분 동안 보는 이에게 거의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자연스럽게 주인공(해고노동자)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진정으로 큰 영화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흔들리지 마라... 승리할 것이다’ 라는 노동자들의 집회와 행진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마지막 남은 좌파 감독 켄 로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흔들리지 마라... 승리할 것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