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설가 배수아를 알지 못한다. 만나본 적이 없으니 차 한잔, 술 한잔을 나눴을 리 없다. 그에 대해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1993년 그의 등장에 대해 평하던 말들이다. 또 한명의 신세대 소설가 탄생, 뭐 이런 유였다. 겁없는 도발의 이미지가 이미 넘치고 있던 터라 그랬을까. 애써 그를 찾아 읽지 않았다.
2003년 봄에 출간된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 1년도 더 지나서 손에 띄었다. 스키야키라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해 호기심이 더 일었다면 모욕일까. 재밌다, 고 주변에 떠들기 시작했다. 돈과 허울 좋은 남자에만 관심있는 ‘돈경숙’이나, 모호한 사상을 타고난 웅변력으로 밀어붙이는 ‘백두연’처럼 인물들은 작명법 자체로 지나치게 뚜렷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나 문체나 문체의 감성은 질박했고 이야기는 가벼운 듯 무거웠다. 그를 대략 오해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1년쯤 더 지나 <에세이스트의 책상>을 만났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이 나왔던 해의 겨울에 나온 책이니 마찬가지로 1년쯤 늦은 셈이다. 흥미롭고 반가웠다. 이 작가가 그 배수아 맞아, 할 정도로 딴판이라는 게 흥미로웠다. 소설이라고 봐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고 말하는 작가는 서사를 배제한 듯 수필 같은 글을 써내려갔다. 음악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영화에 대한 절대적 하대가 그냥 드러나는 식이다. 문장마다 작가가 보였고, 글에 담긴 작가를 음미하려니 읽는 호흡이 한없이 느려졌다. 밀란 쿤데라에 대한 언급이 살짝 나오기도 하는데 반가운 건 여기였다. 그건 막연히 내가 꿈꿔오던 종류의 것이었다. 만약 언젠가 소설을 쓰게 된다면 쿤데라처럼 서사의 힘보다는 사색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글이 나와 어울릴 것 같다는, 오만하고도 자족적인 꿈을 혼자서 흐뭇하게 꾸곤 했다. 걱정은 마시라. 괜히 수천장의 종이를 낭비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서 취미이던 밴드를 그만두려는 다카하시의 심정이랄까. 뭔가를 진짜로 창조하는 것이란 “사람들에게 음악을 마음속 깊이 전달되게 해서, 내 몸도 물리적으로 얼마간 스르륵 이동하고, 그와 동시에, 듣는 사람의 몸도 물리적으로 스르륵 이동하게 하는 것”인데 그는 그럴 자신이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글로, 더구나 소설로 스르륵 이동하거나 이동시킬 재주가 없다. 얘기가 잠깐 샜다. 하여튼 신세대 작가 배수아가 쿤데라식으로 썼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글이 묵직해서 그가 듬직한 친구처럼 여겨졌다. 다만, 어떤 우울이 엿보였는데 그건 그의 감수성 탓이려니 했다.
과거가 궁금해져 2000년에 나온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구해봤다. 연애, 섹스, 결혼 등에 관한 태도나 이야기가 딱 신세대스러웠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와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말하자면 아수라 백작처럼 같은 얼굴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요는 지난 6월 나온 <당나귀들>. 설레는 맘으로 얼른 집어들었다. 이건 박찬욱 감독이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고 나서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랄까, <에세이스트의 책상>과 밀란 쿤데라의 아주 센 조우랄까. 근데 타나토스의 충동이 아니라 타나토스의 절규로 끝나는 게 아닌가. 헤어날 것 같지 않은 절망과 우울이 그의 예민한 신경줄을 찍어누르는 거였다. 심상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물론 추측이다).
나의 이기심이 혹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의 글에 실려 어디론가 스르륵 이동하고 싶다. 더불어 그 자신도 스르륵 이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 ‘스르륵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게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