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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SF시리즈 <닥터 후> [1]
김도훈 2005-08-04

영국 SF시리즈 <닥터 후>를 시청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로즈. 어린 시절에 사람들이 지구가 돌고 있다고 말해줬던 순간을 기억하니. 물론 너는 믿을 수가 없었겠지. 모든 게 그저 조용히 정지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어. 지구의 자전 말이야.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이 시간당 1천 마일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리고 이 행성이 시간당 6700마일의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맹렬하게 돌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어.” <BBC>가 14년 만에 부활시킨 <닥터 후>는 은하의 자전을 감지할 수 있는 시간 탐험가 ‘닥터’와 평범한 영국 소녀 ‘로즈’의 모험을 그린 13부작 미니시리즈다. 폭발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닥터 후>의 모험담은 전 유럽권의 열광을 불러일으켰고, 유럽을 제외한 비영어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수출되어 KBS에서 방영되었다. 인터넷 게시판을 중심으로 뒤늦게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SF시리즈 <닥터 후>를 여행하는, 혹은 앞으로 여행하게 될 히치하이커를 위한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의 가이드북.

경찰용 비상전화박스를 타고 은하계 저편으로부터 날아온 남자가 “나랑 이 모든 모험을 함께하지 않을래?”라고 물어본다면 당신은 어쩔 것이냐. 아니, 안 되지. 직장은 어쩔 것이고 사라진 딸(아들)을 찾아 동네방네 울고다닐 엄마는 어쩔 것이냐. 남자가 망설이는 당신에게 “참, 이 전화박스는 시간여행도 된다우”라고 덧붙인다면? 그때는 정말로 두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전화박스 속으로 재빨리 뛰어들어 시공을 초월한 모험을 시작하는 수밖에. 미스터리의 여행객 ‘닥터’와 그의 여행에 동참하게 된 지구소녀 ‘로즈’의 모험을 다룬 <BBC>의 13부작 SF시리즈 <닥터 후>는 바로 그렇게 시작한다. 마치 피터 팬이 웬디에게 손을 건네 네버랜드로 가자고 유혹하듯, 닥터는 로즈의 손을 이끌고 파란색 전화박스로 향한다.

1963년 첫 방영된 영국 고전 SF시리즈

언뜻 아동용 판타지 동화의 시작처럼 들리는 <닥터 후>의 시작은 기나긴 신드롬의 시작이었다. 올해 3월 <BBC>가 <닥터 후>의 방영을 시작하자마자 영국인들 모두가 ‘닥터 훌리건’이 되었다. 첫 시청률은 기록적인 43%. 토요일 저녁 7시가 되면 펍에서 맥주를 들이켜던 남자들마저 서둘러 귀가해 TV를 켰다. 올디스 벗 구디스(Oldies But Goodies)라. 사실 영국인들에게 <닥터 후>는 전혀 낯선 시리즈가 아니었다. <닥터 후>는 1963년에 첫 시리즈가 방영된 이래 1989년까지 모두 26개 시즌(600편의 에피소드)으로 드문드문 이어졌던 BBC의 고전 SF시리즈였으니, 14년 만에 돌아온 닥터에 쏟아진 열광적인 반응은 ‘낡은 것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영국인 특유의 성격과도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영국에는 40년 동안 중단없이 방영 중인 소프 오페라도 있다). 어쨌거나 “10살이 되던 해 옛날의 닥터에게서 받은 사인을 간직하고 있다”는 늙은이들과 “처음으로 (상업방송이 아닌) <BBC> 채널에 눈을 고정하게 되었다”는 어린아이들이 동시에 똑같은 모험에 빠져든 것은 영국인들도 생각지 못했던 사건이었을 것이다.

공상적인 시간여행을 넘어 ‘인간의 드라마’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닥터 후>는 닥터와 로즈의 시공을 초월한 모험을 다룬다. 두 사람은 종말을 고하는 지구를 지켜보기도 하고(에피소드2 <세상의 종말>), 찰스 디킨스를 만나기도 하고(에피소드3 <동요하는 죽은 자들>), 외계인들의 지구 침략을 막아내기도 한다(에피소드4, 5 <런던의 에일리언>과 마지막 에피소드). 그런데 ‘시공을 초월한’이라는 단어가 다분히 장르 모멸적인 함의가 담긴 ‘공상적인’이라는 의미로 치환되지 않는다는 것이 <닥터 후>의 현명한 매력이다. <닥터 후>를 관통하는 재미는 기본적으로 잘 짜여진 드라마와 영국 시리즈 특유의 건조한 위트에서 오며, 그 중심에는 두명의 매력적인 주인공이 있다. 닥터는 우주를 떠도는 집시나 보헤미안 같은 존재다. 크리스토퍼 에클스턴(<쥬드> <쉘로우 그레이브>)에 의해 절묘하게 캐릭터화된 닥터는 어떠한 의무감도 지니고 있지 않다. 닥터가 지구의 멸망을 막고 인간의 목숨을 구하려 애쓰는 경우, 이는 영웅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그저 인간들의 하잘것없는 운명을 가엾게 여기는 덕이다.

닥터가 미국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다면 테스토스테론 넘치는 우주의 영웅이었겠지만, <닥터 후>의 닥터는 영국 북부에서 건너온 젊은 히치하이커처럼 쉬이 시청자들의 가슴에 젖어든다. 여행의 동반자인 로즈는 닥터의 빈곳을 채워주는 속시원한 캐릭터다. 런던 변두리의 아파트 단지에서 합류한 이 아가씨는 (인간의 탈을 쓰긴 했지만 전혀 다른 종족인) 닥터에게 무모하게만 보이는 인간적인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조금씩 일깨워준다. <닥터 후>가 SF의 외피를 둘러쓰고서도 한정된 팬층에만 어필하지 않는 이유는, 이처럼 지상에 발을 대고 있는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인간의 드라마’가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닥터가 위험에 처한 로즈를 2000년 전의 ‘현재’로 돌려보내버린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닥터 후>의 철학은 오롯하다. “닥터는 지금 지구를 위해 싸우는데 나는 여기 앉아서 프렌치 프라이나 먹고 있어. 매일매일 뭘 하고 살아야 하지? 버스타고 직장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드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잖아.” 로즈는 엄마에게 “그건 더 나은 삶이었어. 은하계를 여행하거나 온갖 에일리언들을 본 일들을 말하는 게 아니야. 닥터는 삶을 더 잘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어”라고 외치며 다시 닥터를 찾아나선다. 이 에피소드에 감화된 영국 시청자들이 뒤늦게 자원봉사에 뛰어들기도 했다는 소탈한 미담에 코웃음을 치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게다. <닥터 후>에는 우주적 모험이 뿜어내는 아드레날린만큼이나 보는 이의 가슴을 건드리는 감정의 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2005년판 작가는 <퀴어 애즈 포크>의 러셀 T. 데이비스

새로운 <닥터 후> 시리즈의 성공담을 이야기할 때 작가이자 시리즈의 총책임자인 러셀 T. 데이비스를 빼놓을 수는 없다.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가 “영국 문화계의 가장 훌륭한 재능 중 하나”라고 칭찬해 마지않는 이 63년생 작가는 동성애자들의 삶을 다룬 <BBC> 드라마 <퀴어 애즈 포크>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BBC>는 <닥터 후>를 21세기 시청자의 구미에 맞게 재해석하는 동시에 오래된 팬들도 끌어안을 수 있는 적임자로서 러셀 T. 데이비스를 낙점했다. 그가 <닥터 후>의 열광적인 팬이기에 앞서 드라마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연출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시청자들을 껴안을 필요가 있지만 거기에 맞설 필요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SF의 껍데기 위에 드라마를 더욱 강조해야만 한다”는 그의 신념처럼, <닥터 후>는 소년들을 위한 주말용 SF 판타지를 넘어 <BBC>의 전통을 잇는 강한 드라마를 지닌 시리즈로 근사하게 재창조되었다.

예를 들어, 닥터의 가장 거대한 적인 깡통로봇 ‘달렉’이 등장하는 순간 한국의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피식거렸을 것이다. 마치 후추통에 화장실 도구를 멋대로 꽂아놓은 듯한 달렉은 ‘은하계 최고의 악당’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달렉이 로즈의 유전자를 흡수하면서 살상기계로서의 자아에 대한 딜레마에 빠지는 6번째 에피소드 <달렉>은 깡통로봇 달렉한테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주인공 같은 입체감을 부여한다. “항상 간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간결함이라는 것이 곧 백치 같은 드라마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달렉은 완벽할 정도로 순수하고 간단한 생명체다. 그런 간결함 아래에 복잡한 감정과 아이디어를 실음으로써 오히려 엄청나게 강한 적으로 만들 수 있다.” 물론 <닥터 후>에 전기양의 꿈을 꾸는 깡통로봇의 숙명만이 드리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달렉은 끔찍한 악당들이고, 모험은 항상 엉뚱한 함정으로 빠져들고, 닥터는 ‘타임로드(Lord)’라는 이름과 달리 실수연발이다. <닥터 후>를 하나로 지칭한다면 아마도 ‘소시민적 영웅의 스페이스 오페라’ 정도가 아닐까. 아찔하게 다음회를 기다리게 만드는.

소탈한 영국식 유머와 재치에 시청자들 재방영 촉구

스파이스 걸스 이후 최고의 영국 수출품이 된 <닥터 후>는 KBS에서 매주 2회씩 연달아 방영했다. 13회에 불과한 작품이어서 사람들이 그 매력을 알아보기도 전에 시리즈는 방영을 끝마쳤지만, KBS 게시판과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서 ‘인터넷 다시 보기’와 ‘재방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성난 쓰나미처럼 넘실대고 있다. 아쉬워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KBS는 현재 <BBC>가 제작 중인 크리스마스 특별 에피소드와 내년에 방영될 두 번째 시즌을 꼭 방영할 예정이며, 뒤늦게 불붙은 열혈팬들의 성화에 힘입어 첫 번째 시즌의 재방영도 심각하게 고려 중이라고 한다. 기다림은 그리 오래지 않을 터이니, 은하계를 여행하는 닥터의 전화박스에 올라타기 전에 호흡을 천천히 가다듬어보자. 닥터는 아직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고, 히치하이킹에는 원래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닥터 후> 주요 등장인물

(왼쪽부터)닥터, 로즈 타일러, 캡틴 잭 하크니스, 미키, 재키

닥터/ 행성 갈리프레이에서 온 타임로드(Time Lord). 타임로드들은 타디스(Tardis)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지만, 우주의 법칙에 적극적으로 참견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지니고 있다. 타임로드들은 살인종족인 달렉을 멸망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함께 파멸시켰고, 닥터는 타임로드족의 슬픈 운명을 기억하며 홀로 떠도는 마지막 생존자다.

로즈 타일러/ 백화점 옷가게에서 일하던 19살 소녀. 철없는 홀엄마 재키와 살아가던 그는 우연히 닥터 후를 만나게 된다. 평범한 삶에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누군지도 모르는(게다가 상당히 무례하고 제멋대로인) 닥터와 함께 은하계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가 될 것이냐. 로즈는 후자를 택한다.

캡틴 잭 하크니스/ 40년대 공군 제복을 입고 느끼한 미소를 흘리며 시공간을 탐험하는 미남 여행자(혹은 사기꾼).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을 무대로 한 에피소드9 <텅빈 아이>에서 처음으로 닥터 일행과 만난다. 닥터의 말에 따르자면 “(아마도 성적으로) 유연한 51세기 출신”이기 때문에 남녀 모두에게 능수능란한 양성애자.

미키와 재키/ 로즈의 남자친구와 엄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두 사람은 로즈와 닥터의 모험에 점점 말려들어간다. 대개의 미국 SF시리즈들과 달리 <닥터 후>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극에 개입시킨다. 소시민인 미키와 재키는 <닥터 후>의 비현실성에 현실적인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캐릭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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