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 갓 도착한 영국인 존 부어맨은 아메리칸 뉴시네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르영화도 아닌 이상한 영화 한편을 만든다. 굳이 모던 누아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겠으나, 네오 누아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자면 아직 몇년을 더 기다려야 할 때였다. <포인트 블랭크>는 당시 정점에 있던 유럽 뉴웨이브와 작가영화가 아메리칸 뉴시네마과 조우한 대표적인 예다. 한 남자가 총에 맞는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부인과 친구를 찾아내 복수하고 자기 몫을 찾으려 한다.
존 부어맨은 DVD의 음성해설에서 <포인트 블랭크>가 죽은 자의 꿈 혹은 죽는 순간에 떠오른 생각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마약에 취한 듯 초현실·퀴어·사이키델릭·수정주의 누아르가 뒤범벅된 <포인트 블랭크>는 누아르가 꾸는 난폭한 악몽이다. 죽은 자는 알카트라즈의 폐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며, 그토록 원했던 돈을 눈앞에 두고도 어둠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그래서 <포인트 블랭크>는 혼란스러운 무조음악과 음산한 여자의 노래로 구성된 레퀴엠처럼 보인다. <포인트 블랭크>로 터프가이의 정의를 내린 리 마빈은 <프라임 컷>에선 더이상 원숙할 수 없는 터프가이를 연기한다. <프라임 컷>은 텍사스의 망나니 형제와 시카고 갱의 대결을 통해 야만의 초대장에 맞선 문명의 충돌이란 오랜 미국식 주제를 다룬 작품이다.
<프라임 컷>을 연출한 마이클 리치는 이젠 거의 잊혀진 이름이 됐지만, 한때 미국의 현실을 유려하게 풍자하는 감독으로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7분간 이어지는 오프닝신만으로 폭력과 소비, 섹스, 산업을 압축해서 보여준 그가 이후에 만든 <후보자>와 <스마일>은 로버트 알트먼의 작품들과 비견되곤 한다. 그가 작가의 문턱에서 넘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리 마빈의 영화가 연이어 DVD로 출시되는 가운데, <포인트 블랭크>와 <프라임 컷> DVD가 한주 간격으로 선보였다. 본편만 수록된 <프라임 컷> DVD에 비해 <포인트 블랭크> DVD의 부록이 좋다. <포인트 블랭크>의 영향을 받아 <라이미>를 만든 스티븐 소더버그와 부어맨이 음성해설을 맡았다. 부어맨은 마빈이 영화에 출연하는 조건으로 쓰레기 같은 기존 스크립트를 버릴 것을 요구했다면서, 멜 깁슨이 출연한 <페이백>은 그때 버린 스크립트를 기초로 만들어진 리메이크라고 비웃는다. 그리고 ‘더 록’으로 불리는 알카트라즈 섬과 영화에 대한 2부작 홍보영상을 수록해놓았다. 와이드 스크린, 컬러, 사운드의 사용과 편집이 독특한 영화인 만큼 DVD를 확실한 분석도구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