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재미있으면 사람들도 재미있을 줄 알고 만들었지. 감독들만 좋아하더라고. 감독들은 하나도 안 중요한데 말야….” <올드보이>의 차분하고 여유로운 음성해설과는 달리, <복수는 나의 것>에서의 박찬욱 감독은 내내 심드렁하다. 가끔은 말투에서 열심히 만든 작품이 저평가된 것에 대한 불만이 드러난다. 동료 감독 류승완과 함께한 <복수는 나의 것>의 음성해설은 복수라는 상투적인 소재를 좀더 개성적인 영화로 승화하려 했던 흔적을 더듬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러한 작품의 핵심은 느닷없음, 부조리, 불친절함, 엉뚱함, 아이러니 등으로 가득 찬 결과물이 되어버렸고, 관객은 자신들이 외면하고자 했던 것들만을 골라서 보여주는 영화를 싫어했다. 되돌아보면, <복수는 나의 것>은 <올드보이>나 <친절한 금자씨>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세상은 선한 사람들이 무심코 저지르는 악행투성이고, 세편 모두 그 틈바구니에서 집요하게 기다리고 기다려 자신의 존재를 증명(복수)하고야 마는 자들의 이야기니까. 그런데 왜 망했을까? <올드보이>가 무엇보다도 ‘감독의 영화’로서 관객을 압도했다면 이거야말로 진짜 ‘감독의 영화’였을 텐데. 음성해설과 함께 다시 보고 듣는 <복수는 나의 것>은 이른바 ‘복수 원작’의 원점으로서 손색이 없는 작품임을 재확인시킨다. 당신이 <올드보이>에 열광했고 <친절한 금자씨>를 손꼽아 기대하고 있다면 이 ‘망한 영화’의 먼지를 한번쯤은 털어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와 함께 감상하면 감독의 복수 이야기들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일별할 수 있다.
기름때가 낀 손가락. 장면 하나하나의 섬세함도 놓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