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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삼순>의 헨리 김 역, 대니얼 헤니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5-08-04

“내 원칙은 너무 멀리 내다보지 않는 것이에요”

시선이란 얼마나 간교한가. 전지현과 함께 찍은 디지털카메라 CF에서 원경에 불과했던 대니얼 헤니(27)는 어느새 같은 CF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독차지한다. <내 이름은 김삼순> 이후 헤니는 그저 아름다운 피사체가 아니다. 대중이 알고 싶어 안달내는 비밀을 품은 얼굴을 갖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모델이 숙명적으로 질투할 수밖에 없는 배우만의 권능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그가 연기한 헨리 김은, 사랑의 변질을 믿지 못해 휘청거리는 여자 희진 곁에 버티고 선 젊은 느티나무였다. 100% 영어 대사로 주연급 인물을 보여주는, TV드라마로서 대담무쌍한 모험을 성공시킨 헤니의 매력은 무엇일까? 먹으로 친 난초 같은 이목구비와 프락시텔레스의 조각 헤르메스를 닮은 토르소? 물론이다. 하지만 많은 여자들은 헤니가 전신은커녕 실물도 드러내기 전에, 희진에게 보낸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그를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이 기울었다. 그것은 특별한 미소의 힘이었다. 마른 목을 적시고 못박힌 발을 닦아줄 것 같은 맑은 물 같은 미소. 헨리는 별을 관찰하는 점성술사처럼 희진의 두눈을 들여다보며, 포옹이나 키스 대신 시선으로 그녀를 애무하고 가졌다.

지나치게 널리 그러나 지나치게 적게 알려진 이 남자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영국계 아버지와 한국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잘 나가는 농구선수로 일리노이대학 시카고 캠퍼스에서 청춘을 보낸 헤니가 우연한 계기로 모델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 톰 포드 등 저명한 디자이너의 쇼에 참여하고 CF 활동을 하는 한편, 뉴욕의 디나극단에서 연기수업을 받으며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도 섰다. <내 이름은 김삼순>의 캐스팅은 올림푸스 카메라 CF 촬영현장에 들렀던 김선아 매니저를 통해 이뤄졌고 그 선택의 달콤한 결실은 대니얼 헤니의 인생 설계를 통째로 흔들어놓았다. 헤니를 만난 것은 <내 이름은 김삼순> 종방 파티 이튿날. 성큼 다가선 카메라가 “귀엽거나 장난스런 표현”을 요구하자 그가 움찔한다. “귀엽다”는 말 한마디 했다가 삼식(현빈)에게 ‘수영장에서 먼지나게’ 맞았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서 그렇다며, 매니저가 웃었다.

-공부한 지 너무 오래 되어 녹슨 영어부터 양해해주세요.

=괜찮아요. 나도 한국어가 예전에는 엄청 유창했는데 지금은 녹이 슬어서 그만. (웃음)

-어젯밤 <내 이름은 김삼순> 쫑파티에서 당신을 겨냥한 폭탄주 레슨이 있을 거라는 풍문도 돌던데요.

=폭탄주는 딱 한잔 했어요. 평소엔 일 마치고 마시는 와인을 좋아해요. 내 집은 뉴욕(현재 생활 근거지) 건물이 흔히 그렇듯 천장이 높고 어두운 색 나무 바닥인데 와인 마시기 좋아요. 바에는 자주 안 가요.

-오랫동안 훌륭한 농구선수였다죠. 그건 당신이 농구를 잘할 뿐 아니라 그 스포츠에 홀려 있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농구라는 게임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주세요.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미시간의 작은 고향 마을의 10대들이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티켓 같은 거였어요. 형제자매도 없으니 혼자 할 수 있는 농구를 몇 시간이고 연습했고 내가 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아아, 첫 3점슛이 들어갔을 때 관중의 열광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요? 농구는 자기규율과 팀 동료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는 스포츠예요. 내가 아는 많은 농구선수는 자의식이 아주 강해요. 학창 시절 농구선수들이 사회에 나가 훌륭한 사업가가 되는 것도 자주 봤어요.

-부모님이 모두 일을 하셔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죠? 유년의 영웅이나 상상의 친구가 있었을 법한데요.

=농구선수와 배우들이 나의 영웅들이었죠.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챔피언십을 휩쓴 89년, 90년 무렵에는 그 팀에 완전 사로잡혀서 침실 벽을 피스톤스의 포스터로 도배했어요. 아이지아 토머스 아세요? 최고로 좋아한 선수였어요. 한편 영화도 무척 좋아해서 한 영화를 몇번씩 보았는데 <탑건>은 100번도 더 봐서 대사를 다 외워요. 부모님과 해물요리를 먹고 <탑건>을 보러 간 1986년의 그날을 잊을 수 없어요. 그 영화에 나오는 <Take My Breath Away>나 <Danger Zone>을 지금도 종종 들어요.

-어쩐지 누군가에게 불친절한 대접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학창 시절에도 인기있는 소년이었나요?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짧은 침묵) 대체로 사람들은 내게 친절한 것 같아요. 하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이유없이 불행을 남에게 발산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어려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그는 스스로를 코리안이라 부른다) 때문에 분투하며 살았어요. 힘겨웠죠. 그러다가 농구에 재능을 발휘하면서 인생이 표변했어요. 사람들이 존중해주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 학생들이 내 게임을 보러 오기도 하고, 졸업 무도회의 왕(prom king)으로도 뽑히고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되고….

-왜 그 이야기를 꺼냈냐면 한국 대중, 특히 여성들이 당신에게 끌리는 1차적 이유는 미모가 아니라, 당신한테 고유하게 내재된 다정함(sweetness)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그런 자질은 살면서 사랑에 굶주려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거라고 믿거든요.

=맞아요. 우리집에는 사랑이 부족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은 참으로 사랑에 능한 분들이에요.

-너무 동화 같아서 거짓말 같은 얘기네요.

=요즘도 부모님을 찾아뵐 때면, 난 잠자러 가기 전에 아빠 뺨에 키스를 하고 “사랑해요”라고 말해요. 2살 때와 똑같이.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펄쩍 뛰어올라 끌어안으세요. 엄만 정말 못 말린다니까요.

-매우 바빴겠지만 조용히 틈을 내서 “정확히 내가 인기있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 적 있어요?

=‘정확히’(precisely). 내가 좋아하는 단어네요. 인터뷰나 TV에서 뭔가 질문을 받으면 그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하고 위장하거나 속이지 않고 적절한 답을 하려고 애써요. 가능하면 정직하고 진실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요.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 어떻게든 전달되는 게 아닐까요? 내 바람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말한 대로 잘 통합되고 건강한 정신의 이미지가 느껴지는데, 그런 당신도 세상 모든 것이 붕괴하는 듯한 순간이 있었겠지요.

=20살 때 들어간 대학 농구팀에서 인종차별 때문에 고통을 겪었어요. 코치는 나를 5분만 출전시키고 줄곧 벤치에 앉혀두었죠. 게다가 아들을 키워달라고 뇌물을 주는 부모들까지 있더군요. 시즌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코트를 혼자 걸어나와 집에 가니 엄마가 TV를 보고 계시더군요. 엄마 맞은편에 가만히 앉았는데 별안간 내 안에서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어요. 난 엄마에게 다가가 아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껴안았어요. 그것이 겨우 5년 전 일이에요.

-그때까지 고민을 상의하지 않은 거군요?

=엄마 마음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 내 안에만 담아두었죠. 엄마는 학교를 옮기는 문제를 전적으로 내게 맡겨주셨고 시카고(일리노이대학)로 팀을 옮긴 뒤 삶이 다시 회복됐어요.

-오디션받는 친구를 데려다주다 우연히 모델이 됐다고 들었는데요, 그렇다면 연기를 배우고 극단에 입단한 것은 의지였나요?

=그래요. 연기는 늘 하고 싶었지만 시도하기 두려웠던 일이었기에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무대 위에서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 오히려 편안했고 연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오히려 위화감이 들었어요.

-많은 배우들이 어떤 결핍 때문에 연기를 시작하는데 당신은 그런 균열이 없어 보여요.

=내게 가장 큰 이유는 그저 연기를 사랑해서입니다. 하지만 뉴욕의 연기학교에서 정신치료의 방도로 연기를 배우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 좋은 치유법이에요.

-지금 당신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모델입니다. 그건 전세계를 쉴새없이 여행하고 하루에도 여러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는 뜻이죠. 그런 식의 생활을 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자아를 보존하나요?

=땅에 발딛는 법 말인가요? 무엇보다 가족이에요. 살다가 무슨 일이 일어나건 집으로 전화하면 변치 않은 내 가족의 목소리가 응답한다는 사실이 나를 동일한 인간으로 지탱해줘요. 이 일에 뛰어들었을 때 아빠는 경고했어요. “조심하렴. 거긴 미친 세계고, 사람을 변질시킬 수 있을 거다”라고. 일을 하면서 끔찍한 일도 근사한 일도 많이 겪었어요.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어떻게 귀결시키고 어떤 사람으로 보일 것인가는 내가 선택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잔인한 얘기지만, 부모님은 언젠가 사라져요. 그렇다면 스스로의 가족을 만드는 것도 당신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되겠군요.

=언젠가는. 다만 지금은 너무 바빠 누군가를 이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건 공명정대하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해요. 5, 6년 더 지나면 생각해야겠죠. (매니저, 갑자기 자리를 뜬다) 아, 그는 서른둘이거든요.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하면서 자학하러 갔나봐. (웃음)

-대중이 특정한 민족에 속하지 않은 외모를 점점 더 아름다움의 이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예컨대 제시카 알바, 데본 아오키 그리고 당신. 변화를 체감하나요?

=나는 행운아예요. 모델 일을 시작한 때는 패션계에서 그런 개방적 시각이 막 고개를 들 때였어요. 홍콩에 진출했을 당시가 마침 유라시안(Eurasian)들이 홍콩 연예계에 등장하고 대중도 그들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기였죠. 사람들이 낯선 것, 이질적인 것에 겁을 먹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이 걸립니다. 반응의 차이요? 유럽이나 미국의 코카시안들은 호기심이 지배적입니다. 동양인들의 국적에 둔감하니까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묻고 무엇보다 동양인의 키가 180cm가 넘는다는 사실에 놀라죠. 아시아의 반응은 훨씬 우호적이죠. 나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국적이나 인종이 개인의 삶에서 의미가 있다고 보나요?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현실적으로는 의미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아요. 부모나 교육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미국은 아직도 인종차별이 강고하죠.

-<내 이름은 김삼순> 이전에도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 참여했고 아시아 TV쇼의 사회자였다고 들었는데요. 인상적인 경험을 꼽는다면?

=내 첫 연극이었던 <Brilliant Traces>의 첫 무대가 막을 올리기 전에 대기실에서 구토했어요. 또 한번은 독백 중에 완전히 새까맣게 대사를 잊어버렸어요. 상대역이 뛰어난 여배우여서 즉흥적으로 무마해준 것이 다행이었죠.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해피 로먼 역(세일즈맨의 두 아들 중 동생)을 맡았었죠? 그는 바람둥이고, 아버지를 위해 늘 행복한 환상을 만들어내려 애쓴다는 점에서 재미있는데요.

=일단 헨리 김과 엄청 다르죠. 내 절친한 친구가 형 비프 로먼으로 분했고 나는 기본적으로 그의 연기를 보고 “저것의 정반대”를 하자고 원칙을 정했어요. 그의 연기는 아주 내성적이고 슬펐고 따라서 내 연기는 늘 폭발하듯 열정적이었죠. 그는 항상 모든 여자를 “예쁜 베이비”라고 부르는 플레이보이예요. 유능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일을 하면 모든 게 굉장히 수월해요. 반대로 나쁜 감독, 동료와 만날 싸우며 일하면 일이 아니라 고문이 되죠.

-특히 당신처럼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한테 그렇겠죠.

=하하. 하지만 누구나 분노가 분출할 때가 있고 나도 화를 터뜨리는 날이 있어요. 아무튼 재미있는 역을 많이 했어요. 바람둥이, 이탈리아 갱. 헨리 김 역을 제안받았을 때 끌린 것은 예전에 전혀 못해 본 역이었다는 점이었어요. 한 여자에게 온전히 헌신적인 남자 역은 처음이라 하나의 도전이었어요. 그리고 간호사였던 엄마는 헨리가 의사라는 사실을 기뻐했어요. 기본적으로 헨리의 캐릭터 묘사를 읽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 역을 못한다, 이건 내 역이야”라고 확신했어요. 꼭 이번뿐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역을 접하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당신은 항상 대화 상대의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모습이었는데요.

=첫째 헨리는 의사잖아요. 의사는 커뮤니케이션에 능한 사람들이죠. 두 번째로 헨리는 타인의 말을 잘 귀기울여 듣는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경청하는 사람들은 시선을 맞추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건 연기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배우 경력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나요? 배우가 모델보다 우월한 직업이거나, 같은 맥락에서 어떤 다른 직업보다 우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연기를 할 때만 내가 완벽하게 즐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잘 쓰여진 신을 연기할 때- 특히 연극 무대에서- 의 느낌과 비교할 만한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그리고 나는 평생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헨리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지도록 도울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는 자부심을 느껴요. 그리고 연기는 불멸이잖아요. DVD가 있으니.

-정말 무대를 좋아하는군요. 인디록 밴드 활동도 하죠? 그것도 무대 위의 일이군요.

=(수줍게) 우린 그렇게 훌륭하진 않아요. 스타일은 에어로 스미스풍이죠. 그래요. 구식이죠. 돈도 받냐고요? 운이 좋아서 가끔은요. 공짜 맥주도 얻어 마시고요.

-나의 의구심은 당신이 꼭 한국에서 일할 필요가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한국의 쇼 비즈니스가 당신의 경력 설계에서 어떤 지점을 차지하나요? 일종의 플랫폼인가요?

=사실이에요. 그러나 나는 어디서 일하느냐가 아니라, 작품의 질과 감독의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요. 그것이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예요. 동남아나 일본, 중국과 비해서도 한국 대중문화, 특히 영화는 할리우드에 견줄 만큼 훌륭해요. 4, 5편의 영화를 봤을 뿐이지만 <올드보이>는 훌륭했어요. 연기도 스토리도. 그리고 그 문어장면, 와우! 그걸 뭐라고 부르죠? 맞아요. 산낙지.

-그런데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당신이 산낙지를 먹는 장면이 있었잖아요?

=감독님한테 말했어요. 리허설은 못 한다고, 딱 한번만이라고요. 요점은 당신이 산낙지를 직접 죽여야 한다는 거죠. (먹다가 죽은 사람도 있다는 사진기자의 말에)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 맛있지도 않던데요. 생선회나 모든 음식을 편견없이 좋아하지만, 그저 난 음식이 먹기 전에 죽어 있기만 바랄 뿐이에요.(웃음) <엽기적인 그녀>도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씨네21> 표지를 가리키며) 이 배우가 출연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 이야기, 맞다 <혈의 누>도 훌륭했어요.

-당신의 취향을 짐작할 수 없는데요.

=내가 보는 기준은 연기의 질이에요. 뭔가 아니다 싶으면 꿰뚫어볼 수 있어요. 내가 배우니까 영화를 보다가 배우가 그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빠져나가 있을 때는 알 수 있어요. 꼭 나쁜 연기라는 게 아니에요. 연기는 어려운 일이니까요. 좋은 배우도 나쁜 작품들을 거쳐 가는 걸 많이 봐왔어요. 누구나 그렇죠. 아마 나도 분명 그렇겠죠. 부족하기 짝이 없고 배울 게 많으니까요.

-모델, 인디록 밴드 활동, 배우. 당신의 삶을 구성하는 일들은 모두 젊음과 관련이 있어요. 노년의 삶을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호주 해변에 앉아 마티니를 들이켜는 모습? 농담이에요. (웃음) 내 원칙은 너무 멀리 내다보지 않는 것이에요.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죠. 두려움은 없어요. 특히 연기는 나이들 수록 좋아질 수 있는 일이잖아요? 가장 훌륭한 배우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인데, 앤서니 홉킨스, 알 파치노를 봐요. 내가 그들 같다는 뜻은 아니에요. 젊은 세대 중에는 조니 뎁과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을 너무 좋아해요.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도 무인도의 은둔자로 잠깐 출연했죠? 즐겨보는 TV프로그램인가요?

=그 밖에도 굉장히 많은 (강남 케이블이 방영하는 거의 모든 채널) 프로그램을 봐요. 특히 <웃음을 찾는 사람들> 같은 쇼를 좋아해요. 대사가 빨라서 알아듣기 어렵긴 하지만. 한국 코미디에서 내가 관찰한 한 가지는, 어린이를 흉내내는 연기에 대한 집착이에요. 성인이 뺨을 분홍색으로 칠하고 “우우 안녕?” 하는 거죠. 처음에는 참 이상했어요.

-아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게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일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팬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 예술가가 있나요?

=화가 척 클로스와 앤디 워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좋아해요. 살바도르 달리도 무척 좋아해요. 그의 그림과 조각은 대단한 시각적 엔터테인먼트예요. 클로스와 달리는 인간을 거의 공포스런 경지까지 이상한 모습으로 밀어붙이잖아요. 인간의 다른 모습을 끌어내는 예술가들, 나는 그들에게 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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