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8월6일(토) 밤 11시40분

<악마의 씨>는 영화 역사상 가장 비극적 에피소드를 지닌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는 어느 평범한 가정주부가 악의 씨앗을 뱃속에 간직하는 줄거리다. 그런데 잔혹한 영화의 내용에 못지않은, 현실의 비극이 이어졌는데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부인이 만삭의 상태에서 광신도들에게 살해된 것이다. 범인들이 <악마의 씨>를 보고 어느 정도 범죄의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이 뒤따른 것은 물론이고 이후 영화를 둘러싼 폭력성, 이미지의 폭력성 문제를 오랫동안 곱씹게 만들었다.

로즈메리는 배우이자 남편인 가이와 맨해튼의 아파트로 이사한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아파트에서 부부는 이웃의 친절한 노부부와 가까워지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로즈메리가 화장실에서 만났던 한 여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로즈메리는 악몽을 꾼 뒤 임신하게 된다. 그녀는 산부인과 의사를 통해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뒤로도 로즈메리의 주위에는 불길한 여러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악마의 씨>는 어린이, 혹은 태아를 통해 악이 전파된다는 엇비슷한 내용의 공포영화들의 효시가 되었다. <엑소시스트>(1973)나 <오멘>(1976) 등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1970년대 공포영화에 있어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비평가들이 진단했듯 일군의 공포영화들이 기존의 사회질서 혹은 가치관을 뒤흔드는 청년문화에 대한, 보수세력의 공포심을 은유한 것으로 읽히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다. <악마의 씨>는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어떤 섬뜩함을 전달하고 있는데, 일상의 껍질 밑에 잠복해 있는 공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방식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웃들이 악마숭배자들이며 믿었던 남편이 악마와 계약을 한 사람이고, 뱃속의 아이가 악마의 씨앗이라는 설정은 충격적이다. 다른 공포영화와 달리 <악마의 씨>는 놀랄 만한 장면이나 특수효과보다 인물의 무의식에 잠복해 있는 이미지, 가장 순박한 사람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하는 악의 모습을 통해 관객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주연을 맡은 미아 패로는 가냘픈 외모로 신경증적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미국 인디영화의 전설인 존 카사베츠 감독이 배우로 출연하고 있기도 하다.

장편영화 <물속의 칼>(1962)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폴란스키 감독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경우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악마의 씨>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뒀고 이후 감독은 <차이나타운>(1974)이라는 걸작을 만들었다. 최근 폴란스키 감독은 그의 어느 연출작보다 휴머니즘의 흔적이 짙은 <피아니스트>를 만든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