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똑같은 소리… 강준만은 이제 지겨워.” 주변에서 이 말이 나오기 시작한 지도 꽤 오래다. 온 나라가 만날 한 가지 이슈에 휩쓸리고 또 그 이슈는 만날 변하는 사회에서 몇년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강준만이 지겹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강준만이 몇년째 거듭하고 있는 바로 그 소리, 이른바 <조선일보> 문제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건재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 개혁에 ‘할말은 함’으로써 수구세력의 돈궤를 지키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지겨운 건 강준만이 아니다.
강준만이 지겹다는 말은 강준만의 방법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조선일보 제몫 찾아주기 운동’을 둘러싼 그의 방법은 어딘가 저잣거리의 시비 같은 데가 있어 그의 공식적인 적대자들은 물론 그의 주장을 대놓고 적대하기 어려운 좌파 혹은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의 심기를 거스른다. 강준만이 이른바 <조선일보>에 협조적인 지식인들의 명단을 <월간 인물과사상>에 게시하자 그의 비공식적인 적대자들은 강준만이라는 불한당을 향해 동병상련의 정으로 단결한다. 21세기의 목전에 대대적인 빨갱이사냥을 당하고도 <조선일보>가 극우신문이라는 최소한의 합의조차 이루지 못한 그 못난이들이 말이다.
그들이 공동으로 개발한 논리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이다. 강준만의 말은 옳지만 방법은 틀렸다는 얘기로, 강준만의 주장과 실천을 분리해 강준만을 무력화하려는 노회한 논리다. 내 기억에 그런 말을 처음 사용한 건 손호철 김세균 같은 강단좌파들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사람들이 <조선일보>라는 봉건적 신문에 보이는 무색무취한 태도와 강준만에 보이는 단호한 태도가 말이다(그들의 잡지 <진보평론>엔 ‘Radical Review’라는 멋진 영문 제목이 붙어 있다는데, 그들은 그야말로 지적 유희의 정수를 ‘급진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동병상련의 논리를 애용하는 또다른 경우가 메이저 시민운동단체의 인사들이다. 최장집 사건 당시 시민운동권에서는 <조선일보> 취재 거부운동이 벌어졌지만 공교롭게도 이른바 3대 메이저 단체인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은 빠졌다. 그 일을 두고 강준만이 그들을 강하게 비판하자 그들은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를 사용했다. 강준만은 그들이 언론플레이에 미쳤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했다. 그들이 <조선일보>와 어떤 내통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강준만의 주장이 객관적인 정황인 건 분명하다.
알다시피 그들은 요즘 낙선운동에 열심이다. 나는 내가 강준만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하듯 낙선운동의 방법을 최선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지지한다. 민주주의란 본디 작고 많은 비합법성을 모아 큰 변화를 이루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지식인들을 부역자처럼 게시하는 덜 합리적인 방법으로라도 지식인들을 <조선일보>에서 분리해내려 한다. 시민운동단체들은 낙천, 낙선되어야 할 후보들의 명단을 게시하는 덜 민주적인 방법으로라도 정치권의 인적 청산을 이루려 한다.
가상현실게임 동호인들(이른바 강단좌파들)이 그러는 거야 학술영역의 문제라 치더라도, 낙선운동을 하는 시민운동가들이 강준만의 방법을 “<조선일보>를 <조선일보>와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것이라 폄하하는 일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강준만의 운동과 낙선운동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같고, 20세기의 막판까지 빨갱이사냥을 일삼은 극우신문에서 지식인들을 분리해내는 일과 감옥에나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을 국회의사당에서 쓸어내는 일은 차선의 선택을 감수할 만큼 유익하다. 강준만의 운동은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을 청소하는 일이고 낙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근대성을 고양하는 일이다. 전근대와 근대가 뒤섞여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좃선운동과 낙선운동은 서로 존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상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