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 만나 신데렐라 되기 ▷ 왕자 데려다 ‘삼식이’ 만들기
‘여자의 적’은 여자 ▷ 연적의 아픔 어루만지기
상대 파트너와 손잡고 음모꾸미기 ▷ 함께 화투치며 친구하기
지난 21일 밤 10시, 티브이 앞에 앉은 이들 중 절반이 삼순이와 눈을 맞췄다. 8주라는 길지 않은 시간, 눈귀는 즐겁게 마음은 후련케 했던 삼순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극찬을 받았다. 티브이 드라마라는 한계를 감안할 때, 지금까지 가장 진보한 여성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신데렐라의 혐의를 완전히 벗진 못 했지만, 리얼리티를 세밀하게 살리며 삶의 진정성을 깊이 있게 담아내 공감을 자아냈다. 또한 이로부터 사회적 의제 설정 기능까지 해냈기에 기존 신데렐라 드라마의 신드롬과는 전혀 다른 성과를 냈다. 삼순이와 진헌·희진·헨리의 인간관계를 통해 <내 이름은 김삼순>을 돌아본다.
■ 삼순과 진헌…삼순이는 삼순이=진헌은 외형상 재벌2세이며, 형과 형수를 교통사고에서 잃은 개인적인 아픔을 감추고 있다. 순정만화 속 비련의 남자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삼순이와 진헌의 만남이 신데렐라의 한계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뿌리다. 그리고 평범한 30대 여성 삼순이의 모습에서 비롯한 ‘공감’은 ‘대리만족’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진헌의 별명은 삼식이. 진헌을 만난 삼순이가 신데렐라로 변신하기에 앞서, 진헌이 삼식이로 몸을 바꾼다. 왕자와 신데렐라가 아닌, 삼식이와 삼순이인 것이다. 레스토랑 사장과 파티시에라는 직업적 특성도 양념의 쓰임새일 뿐이었다. 왕자가 신데렐라를 이끌기보다, 삼순이가 삼식이를 이끄는 역할 변화가 이뤄졌다.
그래서 삼순이는 진헌을 만나고 나서도 이전의 삼순이와 다르지 않다. 더 얌전해지지도 않고, 갑자기 내숭을 떨지도 않는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개명을 둘러싼 심적 갈등을 통해 신데렐라의 고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지만, 결론은 ‘한 번 삼순이는 영원한 삼순이’라는 것이다.
삼순이의 마지막 대사를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 투닥투닥 싸우고 화해하고, 웃고, 울고, 연애질을 한다.…지금 내가 해야할 일은 명백하다. 열심히 케이크를 굽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나 김삼순을 사랑하는것.”
■ 삼순과 희진…자매애의 발견=삼순이와 희진의 관계는 이 드라마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진헌을 가운데 둔 연적 관계인 삼순과 희진 사이에 일종의 자매애가 엿보이는 것이 그렇다. 기존 드라마와 다른 <내 이름은 김삼순>의 돋보이는 성취다.
서로 머리채를 잡고 싸울 만큼 둘 모두 진헌과의 사랑에 열정적이지만, 틈틈이 고민에 빠지는 것은 상대방에게 그 사랑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드라마에서 결코 화해에 이르지 못하던 연적 관계의 두 여성이 자매애로 묶일 수 있었다. 아픈 희진을 위해 삼순이가 음식을 준비하는 장면이나, 미국으로 떠난 희진이 삼순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가 잘 될 것”이라고 축복하고 삼순이도 “좋은 의사가 될 것”이라고 덕담을 건내는 장면은 다른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연적 사이의 남성들이 의기투합해 건전한 경쟁을 약속하는 유치한 장면들은 어렵잖게 볼 수 있었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두 여성이 각각의 아픔을 넘어서 서로 이해하며 연대하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심정을 잘 안다”는 삼순의 말처럼 두 사람은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시청자들 또한 신데렐라의 대리만족에 머물지 않고, 삼순과 희진에 감정이입하며 자매애를 느낄 수 있었다. 삼순이의 팬들이 삼순과 희진, 어느 편도 들지 못하고 고민했던 까닭이다.
■ 삼순과 헨리…소통의 가능성=헨리와의 관계속에서도 <내 이름은 김삼순>의 뛰어난 점을 엿볼 수 있다. 헨리가 진짜 왕자였다. 희진의 생명을 구하고 헌신적인 사랑까지 아낌없이 바치는 미국 의사. 게다가 희진에게 집착하지 않는 쿨함까지 갖췄다. 뭇 여성들이 꿈꿈직한 완벽한 보호자인 헨리와 삼순이의 관계는 이 드라마에서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지만 매우 특이하다.
헨리는 삼순이를 미워하지 않고, 삼순이는 헨리에게 희진을 낚아채라고 추동질하지 않는다. 기존 드라마와 다르다. 흔히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고자 하는 욕망 탓에 함께 음모를 꾸미게 하거나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소, 닭 쳐다보듯’ 하는 관계였다.
그러나 오히려 진헌과 희진이 오해를 풀고 재회를 하는 동안, 삼순과 헨리는 마주 앉아 우스꽝스러운 대화를 나누며 소통을 시도한다. 언어가 달라 뜻이 어렵게 전달되지만, 삼순은 “마이 네임 이즈 소피”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섹시 쿠키’라는 ‘콩글리쉬’로 헨리를 웃긴다. 삼각관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삼순이는 희진과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난 뒤에도 헨리와 화투를 친다.
말이 통하지 않고 외국인인데다, 애정 관계로 직접 얽히지 않은 타인이 함께 어울리고 자신을 알리려 애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완전한 타인’과의 소통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사랑에 애태우지만 다른 인간관계도 중요하게 여기는 성숙함과 여유로움을 지닌 삼순이의 진면목이 헨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려진 것이다. 삼순이가 소통하려 하는 대상이 이처럼 넓다는 것을 보여줬다.
“내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주인공 네명이 꼽은 ‘명대사’
드라마 종영 기자간담회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 많은 인터뷰 제안을 일일이 들어줄 수 없어, 기자를 한 데 모이게 했단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태평로의 한 호텔에 김선아, 현빈, 정려원, 대니얼 헤니가 모였다. 하나같이 기쁨에 들떠 상기된 표정이었다.
김선아는 “당장 레스토랑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다”면서도 “된장찌개 같이 구수한 느낌의 삼순이를 연기하겠다던 애초 약속은 지킨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삼순이를 통해 성숙해졌다며 흐뭇해했다. “내면이 뭔가 풍요로워진 느낌이에요. 콤플렉스가 있고 소외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솔직해야 내일을 향해 달려갈 수 있다는 얘기를 드라마로 한 거잖아요. 그래서 나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현빈은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배우가 드라마에서 자신이 아닌 캐릭터로 남는게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삼식이로 남아 뿌듯한 거죠.” 지난 드라마 <아일랜드>의 강국 역이 강한 탓에 이미지 변신에 부담스러웠지만, 나름대로 삼식이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는 자평이다.
무엇보다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이는 정려원과 대니얼 헤니다. 특히 연인을 잃은 슬픔을 절절히 연기해낸 정려원은 “동료 연기자들을 잘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털어놨다. “드라마가 시트콤과 많이 달라 긴장을 많이 했었어요. 아직도 긴장이 안 풀리네요. 아직도 제가 희진인 것 같아요….” 첫 드라마로 큰 성공을 거둔 대니얼 헤니도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굉장히 좋은 기회였어요. 친구들을 통해 언어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삼순이가 상상 속 아버지와 술을 마시면서 “내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라고 했던 대사를 명대사로 꼽았다. 특히 이들은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그런데 깨질까봐 너무 겁이나 죽겠어”라는 대사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성공한 기쁨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