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567호에 김소희 기자가 쓴 ‘간밤에 고마웠다’라는 칼럼을 읽고, 한참 웃다가, 한참 머리가 띵했다(칼럼 문패가 ‘김소희의 오 마이 섹스’다. 이거 필독요함이다!). 나, 드디어, 가는구나. 내가 아무리 우리 세대에 하늘로 날아간 헬륨 풍선처럼 현실에 발 안 딛고 둥둥 떠서 살았어도, 나는 가는 세대로구나.
비슷한 경험 하나 더. <GQ>라는 아주 발칙한 남성잡지의 지난 6월호에 ‘쓰리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에디터의 체험담을 옮긴 이 기사는, 음란하지도 음습하지도 않고 쿨했으며 철학적 성찰까지 담겨 있는, 그 자체로 훌륭한 글쓰기이며 읽을 거리였다. 친구가 키득거리며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서, 읽다가 나도 엄청 키득거렸다. 섹스를 양명한 햇살 아래 꺼내놓으니 이렇게 해맑아지기도 하는구나.
그러면서 억울했다. 우리 땐 왜 섹스와 결부되는 단어가 오럴이 아니라 모럴이었지? 우리는 왜 섹스라는 단어를, 늘 축축한 죄의식에 차서, 비밀스럽게 발음해야만 했던 거지? 호르몬이 미쳐 날뛸 시기에조차, 아무리 ‘까진’ 여자애의 머리라 해도, 상상가능한 수준은 고작 여성지 성체험 수기 정도였다. 그러니 ‘쓰리썸’은 상상의 영역에서도 한참 먼 밖일 수밖에.
또래 여자들 모였을 때 ‘쓰리썸’이 뭔지 아는 사람? 여론조사를 했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건지, 몰라서 모르는 건지, 어쨌든 아무도 몰랐다. 섹스, 이 로켓과학보다 중요한 분야에 관한 한, 애석하게도 우리 세대 여자들은 평균 ‘유딩’ 수준이었다.
하긴. 나도 오르가슴을 마흔 넘겨서야 처음 느꼈지. 그때의 성취감이라니! 엄마, 나 오르가슴 먹었어, 외치고 싶은 걸 입 막고 참았지. 두 남자와 도합 15년을 합법적으로 살면서, 내가 성불구자라는 확신에 빠져 있었는데 왜 아니겠어. “자자”라는 대사가 나올까봐 두려움에 떨던 그 숱한 나날들. 안 자주고 못 자주면서, 남편에게 미안해서 몸둘 바 모르던 일그러진 죄의식의 기억들.
최근 전형적 현모양처이던 초딩 동창 하나가 이혼을 당했다. 30몇년 만에 초딩 첫사랑을 만나 그날로 사랑에 빠지고, 그걸 꼴보수 남편한테 들키고, 다 뺏기고 알몸으로 쫓겨나고, 뭐 이런 ‘주부생활’스러운 사연. 소식 듣고 당장 전화를 걸었는데, 휴대전화도 끊겨 있었다. 어휴, 바보. 들키지 말지. 하긴 안 해본 짓을 하려니 그게 되기나 했겠어. 누가 그 친구가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성적으로 타락했다거나 이렇게 쑥덕거렸다면, 아마 내 주먹의 강도를 몸소 측정해줘야 하는 처지가 됐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다른 동창들 다 그 친구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성적으로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물어보나마나, 우리 세대 여성들의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친구는 오르가슴이 뭔지도 모르고, 남편하고 딱 두번 자고 두명의 아이를 낳는 그런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강간인 줄도 모르고 강간당하는 주부의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첫사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 속에 어떤 욕망이 내재해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정숙한 사임당형임을 믿어 마지않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언론들이 이 시대 성모럴에 대해 아무리 호들갑스러운 우려의 멘트를 날려도, 나는 속지 않는다. 우리 시대는 성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성이 곧 도덕성의 모두라는, 혼내 성만이 허용가능한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너무도 어긋나는 도그마에 사소한 규모로 반항하고 있을 따름이다. 혼외 성이 타락의 잣대라면, 성은 가족제도가 시작된 바로 그 순간, 더이상 타락할 수 없이 타락해 있었다. 이 개명천지에도 98.895%(어디서 나온 수치냐고여? 음, 내 직관!)의 결혼한 여자들에게, 섹스는 두려운 의무이며 판타지조차 죄가 되는 음하고 습한 단어일 뿐이다.
성적으로 저개발상태인 것을 자랑으로 알고 살아야 했던, 살고 있는, 가여운 우리 세대 여성들에게 위로의 시 한 구절, 바친다.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천상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