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나가게 되면 무언가 교훈을 얻어오곤 했다. 외부자의 눈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 데서 비롯되는 일종의 ‘반성효과’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여튼 1996년 유럽에 다녀와서는 파란불로 바뀐 전방 50m의 횡단보도로 황급히 달려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유유자적 유럽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보며 ‘한번 사는 인생 조급히 살아 뭐하나’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99년 미국에 다녀온 뒤로는 얼굴 근육의 힘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본심인지 알 순 없지만, 타인에게 항상 생긋 미소를 던지며 말을 하는 그들의 태도가 훌륭해 보였던 것이다. 그해던가, 일본을 다녀온 뒤로는, 음, 돈을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고 각오했다. 그건 도쿄에서 사흘 정도 지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럼 <나의 결혼원정기>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다녀온 우즈베키스탄에선 어떤 교훈을 얻었을까. 싼 물가에 감탄하며 이것저것 사다보니 정작 공항 면세점에서 P모 담배(한국에선 최근 단종됐다)를 구입할 수 없었다는 데선 절제의 미덕을, 죽죽 빠진 우즈벡 여성들에게 눈길을 돌리다가 후배 여기자들로부터 비아냥거림을 산 데서는 집중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달까. 선글라스의 필요성도 함께.
3박5일의 우즈베키스탄 원정을 돌이킬 때 가장 기억나는 건 돌아오기 전날의 일이다. 밤 촬영을 앞두고 취재진은 낮시간 동안 타슈켄트로부터 자동차로 5시간 정도 떨어진 유적지 사마르칸트를 들렀다. 지평선 아래로 해가 사라지는 장관을 보며 돌아오는 길, 우리를 태운 버스는 노변에 있는 한 간이 카페 앞에 섰다. 운전기사의 휴식과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건성건성 생긴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주인으로 보이는 양반이 수박과 차를 내왔다. 수박 한통이라 해봐야 우리 돈으로 500원밖에 안 하는데 누군가 샀겠지, 하면서 우리는 그 꿀 같은 단물을 몸 안에 빨아들였다. 그리고 누군가 “이제 슬슬 일어나야지”라고 할 무렵, 우리를 안내해준 고려인 가이드가 잠깐 할말이 있다고 했다. “이 수박은 저쪽에 앉아 계신 손님들이 나눠준 거고 차는 이 가게 주인이 그냥 대접한 겁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럼 돈으로 보답하지’라듯 우리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눈을 약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이미 돈을 준다고 했는데 안 받는답니다. 이곳 초원의 유목민들은 외부에서 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습니다. 손님에게 아무 조건없이 뭔가를 접대하는 건 이들의 풍습입니다.” 우리는 약간 감동을 먹었고, 잠시 숙연해졌다. 그래도 뭔가를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에 버스 안에서 먹으려고 샀던 우즈벡 빵 한 덩이를 전했더니 우즈벡 손님들은 몇번을 거절하다가 받아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가슴에 얹는 우즈벡 인사법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자, 그럼 아름다운 마음씨의 사람들이여 안녕, 하고 떠나려는데 가이드가 또 한마디를 던진다. “이분들이 바라는 게 하나 있는데… 같이 사진을 찍는 겁니다. 그게 아마 이분들에 대한 예의가 될 겁니다.” 우리는 그들이 앉아 있던 좁은 평상으로 올라가 서로 뒤얽힌 채 사진을 찍었다.
요즘 나는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진 걸 보면 무의식적으로 달려가 건너고, 모르는 이에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신용카드를 휘젓는다. 우즈벡의 유목민들이 마음속에 넣어준 타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씨와 소박한 삶의 태도도 그렇게 은연중에 잊혀져갈까. 방금 웹하드에서 다운받은 그때 그 사진을 액자에라도 끼워넣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