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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라라
2001-07-19

컴퓨터 게임/ <툼레이더> 컬렉터 팩

영화 <툼레이더>의 원작은 게임이다. 파괴와 학살보다는 곡예에 가까운 액션을 보여주는 참신한 시스템으로도 충격을 주었다. 주인공 라라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지금보다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떨어지는 시절이다보니 어찌보면 조금 괴상한 모습이었지만, 멋진 게임 속 액션과 어우러져 수많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나 역시 그녀에게 홀딱 반해 윈도를 <툼레이더>로 도배했고, 부록으로 주는 <툼레이더> 달력을 갖고 싶어서 별 필요없는 잡지를 사기도 했다.

2편이 나오면서 라라의 인기가 한층 더 고조되던 무렵의 일이다. 꽤 큰 규모의 소프트웨어 가게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놀라운 걸 발견했다. 바로 실물 크기 라라 크로프트 등신대 그림이었다. 그냥 얇은 종이가 아니고 두꺼운 나무판을 대어 세워놓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멋지고 좋은 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고, 마음은 맹목적인 소유욕으로 변해갔다.

가지고 싶었다. 너무나 가지고 싶었다. 검은 라텍스 스킨스쿠버복을 입고 작살총을 들고 활짝 웃고 있는 라라를 내 방에 세워놓고 싶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주제에 장사는 무척 안 되는 가게여서, 점원이건 손님이건 한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치고 지나간 십분 동안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았다. 내가 이걸 집어가더라도 공연히 쭈뼛거리지만 않는다면 저지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여기 라라를 세워둔 건 게임을 한장이라도 더 팔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이 없는 매장에서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다. 라라는 무의미한 미소를 보내다가 길어야 한달이면 철거될 것이다. 그리고 함부로 조각나서 쓰레기장에 처박힐 것이다. 적잖은 자원을 들여서 만든 물건을 그렇게 낭비하는 건 비효율적이며 비경제적인 일일 뿐 아니라 에콜로지적 관점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반면 내가 가져가서 소중히 보관한다면 그로 인해 내가 누리는 정신적 효용은, 라라를 제작하는 데 들어간 재화와 용역을 모두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바보가 된다. 함께 갔던 극장표, 고속버스를 타고 지나간 고속도로 통행증, 맛있게 한끼를 먹었던 식당의 성냥까지 소중히 보관한다. 그와 관계된 건 나에게 모두 의미가 있다. 난 단 한 사람만의 팬덤을 구축한다. 그의 마니아가 돼버린다.

냉정하게 말해서 잘 만든 게 아닌 영화 <툼레이더>를 만족스럽게 본 건 라라와 그녀의 살아 있는 분신인 안젤리나 졸리 덕분이다. 그런 나로선 <툼레이더>의 컬렉터 팩 출시는 놓칠 수 없는 소식이다. 시리즈 1편부터 4편까지에다가 티셔츠와 영화 포스터가 들어 있다. 다시 한번 냉정해지자면, 이건 영화 개봉을 노린 상술이다. 이미 한물간 게임을 우려먹으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두근거린다. 벌써 다 해본 게임인데도 또 갖고 싶다.

지금 내 방에 라라 등신대 모형은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몸에 밴 사회규약은 생각보다 강했다. 들키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에 못 그랬다기보다는 너무 파격적인 행동이라서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때 생각이 난다. 방에 두기에는 너무 크고 거치적거리는 물건이고, 매일 보다보면 틀림없이 싫증을 냈을 것이다. 그때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올바른 판단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내 방에 나만의 라라를 가지고 있으먼 내 인생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