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총기난사 사고가 나자 각 신문들의 일성은 모두가 ‘군대의 기강 해이’를 우려하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총체적’이라는 수식어까지 동원해서 군기 잡기를 촉구하고 나섰다. 난 군대 안 가봐서 모르니까, 인터넷에 들어가 채팅창에서 20대, 30대 군필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간명한 정답은 이런 것이었다. “기강이라는 게 뭐죠?” “하급자가 상급자 말을 잘 듣는 거죠.” “군기는 어떻게 잡나요?” “뭐, 무섭게 하는 거죠.” 나아가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때려야 사람이 돼요. 편안하면 불평불만만 는다니까요.”
3대 모녀 4명이 살고 있는 우리 집안에서조차 두 초등생 딸의 효율적인 관리감독을 통해 가정의 기강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가장의 유일한 돈벌이 수단인 컴퓨터 홈페이지가 수시로 게임포털로 바뀌어 있는가 하면, 용돈사용을 자율에 맡겼더니 싸이질하면서 용돈을 온통 도토리에 투자한다거나, 백열한개째 패션 필통을 구입한다거나, 뭐 그런 울화통 터지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뭔지 모르지만, 범인 김 일병이 했다는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사이트의 아이콘도 바탕화면에 떠 있다. 세탁물의 주머니 내용물을 미리 꺼내놓으라고 수백만번 잔소리를 했건만, 은행놀이의 도구인 1조원짜리 가짜지폐가 세탁기 안을 펄프 난장판으로 만드는 불상사가 바로 어제 있었다(진짜 지폐였다면 아마 딸을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둘 다 교정이다 충치치료다 해서 어마어마한 돈 물고 치과를 다니고 있음에도 식사 뒤 바로 양치질하라는 주문은 아이들에게 아랍어처럼 이해하기 힘든 문장인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역시 편모가장이었던 노모의 입장에서 같이 살고 있는 딸을 바라볼 때, 저걸 때려줘 말어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수십년 먹여살려야 할 코흘리개 딸이 둘이나 있건만, 몸에 그렇게 안 좋다는 술 담배를, 그것도 돈도 제대로 못 버는 주제에, 무슨 보약처럼 상복하고 있는 걸 좀 보라지. 거슬러올라가서, 탐탁지 않은 결혼을 제멋대로 두번씩이나 강행하더니 한마디 상의도 없이 위자료 한푼도 못 받고 두번 다 끝장내버리고야 말지 않던가.
군대의 공식을 대입하면, 가정의 기강은 아이가 어른의 말을 잘 듣는 것이고, 가정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종종 때려가면서, 무섭게 굴어야 하겠구나. 가슴 한구석이 찔린다. 나도 가정에 기강이 잡히기를 바라왔다. 나는 엄마 말을 하나도 안 들었으면서, 정작 딸들은 늘 내 말을 잘 듣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는 왜 딸들이 내 말을 잘 듣기를 바라는 걸까? 내 말만 잘 들으면 딸들의 미래가 만사 오케이여서? 물론 내 말과 내 바람이 늘 진리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세대 가치관의 찌질함에 폭 절어 있는 내 말이, 21세기 본류를 살아갈 딸들에게 꼭 정답이 될 수 있을 거란 확신, 생각해보니, 없다. 무엇이 진정으로 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지, 정말이지 나는 모른다는 쪽이 정직한 편일 것이다.
거슬러올라가, 내가 엄마 말을 잘 들었으면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영문과 가라는데 기를 쓰고 ‘굶는 과’라는 국문과를 갔고, 운동하지 말라는데 운동권 기웃거리다가 졸업도 못했고. 내 뜻대로 산 대가로 지금처럼 살게 됐지만, 그게 바로 내 본질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자기 선택 때문에 고생할지라도, 그것이 꼭 불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고민 끝에 결론을 내린다. 기강이 없는 편이, 무엇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없이 기강을 확립하려들 때의 부작용에 비해 훨씬 낫다. 때로는 과도기의 카오스를 매를 들지 않고 관찰하는 참을성도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걱정된다. 군부지도자들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에구구, 주제넘은 걱정은 그만하고 시나 한수 읊으면서 설거지하러 가야겠다.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황인숙 시 <모진 소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