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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감독 3인의 현장 [4] - 이하 감독의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뭐 저런 년이 다 있나’싶은 게 매력

이 감독의 현장을 주목하는 이유 셋!

하나! 단편영화제의 스타감독

이하 감독의 단편영화 <용산탕>과 <1호선>의 주인공은 동네 목욕탕 때밀이와 ‘야메’ 운전학원 원장이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그렇다. 주변인들의 삶을 나름의 방식으로 응원하기 위해 일상의 작은 부분에 현미경을 들이밀고, 극적이거나 치열하지 않은 표면 밑에 은근한 무게를 담는다. 연출작의 전부인 단국대 연극영화과와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두편이 온갖 단편영화제를 휩쓸면서 기대를 모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둘! 빵점자리 시나리오의 불가해한 유혹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좀 이상하다. 하나같이 점잖은 직업을 지녔으면서 치졸한 인물들이 여럿 나오는데 정확히 주인공이 누군지는 모르겠고, 여교수를 둘러싼 애매한 갈등은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상업영화로는 빵점짜리인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는 오가원 PD는 “상업영화로 쉽게 만들어질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완성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달려들었다”고.

셋! 척 하면 착! 숙련된 팀워크

<여교수의…>의 현장에는 단편영화에서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배우와 스탭들이 많다. 정우혁과 유승목, <용산탕>과 <1호선>의 두 주연은 이 영화에서 각각 문 교수와 유 선생으로 출현한다. 그중에도 유 선생은 중심 갈등을 책임지는 주연급 조연. <용산탕>에서 홀딱 벗은 뒷모습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이들 몇몇이 인상적인 단역으로 얼굴을 비춘다. 음악감독과 연출부 일부도 전작의 인연을 잇고 있다. 한편 감독과 촬영감독은 영화아카데미 선후배.

하지를 하루 앞둔 지난 6월20일 오후 6시30분 충청북도 제천시의 한 번화가. 차량이 통제된 거리에 촬영장비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뉘엿뉘엿 기우는 햇살은 세심하게 세팅된 조명처럼 아련하고 황량한 빈 거리, 촬영 전의 여유를 즐기는 스탭들 덕분에 현장은 거대한 스튜디오처럼 느껴진다. ‘차기작은 없다’는 각오로 한계상황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신인감독의 현장에 대한 기대는 잠시 접어야 하는 것일까. “중요하고 긴 신을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야간촬영으로 찍어야 했는데, 어제 웬만한 장면을 찍어놓아서 오늘은 제법 한가한 편”이라고 오가원 PD가 귀띔한다.

이 여자 치사하고 웃기다

이하 감독의 첫 장편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은 그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는 대부분의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한 여교수 은숙(문소리)은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보다 젊고 예쁜 여자를 치사하게 괴롭혀서 그렇지, 처음 만난 날 하룻밤을 보낸 남자에게 어처구니없이 도덕적이고 유치한 쪽지를 남기는 등 귀여운 구석도 있다. 그녀를 두고 백병전을 벌이는 남자들은 어떤가. 교수이고 PD인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콤플렉스를 지닌 홍상수 영화의 남자들처럼 뻔하고 치졸하지만 은숙을 향한 감정은 어쨌거나 진심이다. 한줌도 안 되는 권력을 이용하려 발버둥치는 흠 많은 인물일 뿐이다. “굳이 이 인물을 마음으로 안으려 하지 말고 재수없더라도 ‘뭐 저런 년이 다 있나’라면서 한번 보세요. 그러고나면 그렇게 욕할 수만은 없어요.” 이는 문소리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이 여자를 왜 연기하려고 하냐”며 영화의 출연을 만류하는 매니지먼트사 대표를 설득한 말. 이에 시나리오를 다시 읽어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고. “이 여자, 참 웃기네요.”

요즘은 은근한 미소가 유행입니다

지난 6월2일 제천에서 크랭크인한 <여교수의…>는 이제 12회차에 접어들었다. 6월19일과 20일에 걸쳐 촬영한 장면은 가장 극적인 분량. 애증에 휩싸인 유 선생(유승목)이 술김에 은숙과 석규(지진희)의 어떤 과거를 폭로하겠다며 폭언을 퍼붓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다. 차에 오른 유 선생이 사거리에서 튀어나온 덤프트럭과 충돌하기까지를 한컷에 담아야 하기 때문에 CG팀과 스턴트팀까지 출동했다. 유 선생의 차가 사거리를 지나는 컷, 덤프트럭이 사거리를 지나는 컷, 세워져 있는 자동차를 트럭이 들이받는 컷을 합성해야 한다. 전날 찍었던, 세 사람이 승강이를 벌이다가 유 선생이 차에 오르고 출발하는 컷이 이날의 첫 장면. 언뜻 훔쳐본 전날 촬영분량에선 유 선생의 사고를 목격한 은숙과 석규의 반응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고장면은 다른 컷으로 담으려 했던 모양이지만 이번엔 유 선생의 차가 출발한 뒤 사고가 일어나는 것까지 연결해서 찍을 예정이다. 재촬영에 나선 이하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이들이 사고 뒤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이야기한다.

1분30초가 넘는 컷의 마지막, 유 선생의 차를 따라 포커스를 이동시킬 것인가를 두고 촬영감독과 감독이 논의한다. 한컷 안에서 포커스를 고정한다는 원칙이 있더라도 멀리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고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선 포커스 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 최주영 촬영감독의 입장. 그러나 이하 감독은 “남은 이들의 감정, 갑작스런 사고의 느낌”을 위해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카메라는 자신의 차에 기대고 서 있던 은숙이 깜짝 놀라 주저앉고, 멀뚱하게 유 선생의 차를 바라보던 석규가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을 고집스럽게 바라본다. 자잘한 세팅을 기다리던 감독이 갑자기 예전 촬영분량(은숙과 석규의 과거장면)을 검토한다. 여기서도 예기치 못했던 어떤 사고가 일어난다. “과거의 사고도 한번에 찍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유 선생의 사고장면은 어제 찍고 나서야 연결시켜 한번에 보여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날이 밝고 있던 차에 급하게 찍었기 때문에 그 핑계로 재촬영을 할 수 있게 됐다. 두 사고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여태껏 현장에서 내려야 했던 큰 결정이었다. 그때 제대로 못했으니 이번엔 잘해야 한다. 이 컷 역시 편집실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급하게 내려진 판단이 착오로 드러나고, 그것이 영화 전체의 뉘앙스를 좌우하면서, 점점 애초 감독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상과 완성된 영화가 멀어져가는 것. 그것은 백전노장도 피할 수 없는 촬영현장의 숙명이다. 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만만찮은 데뷔작을 대하는 전략으로 삼은 감독은 퍽 담담해 보였다. “스탭들이 나랑 눈을 마주치면 씩 웃는다. 내가 현장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한다. 상업영화로는 많은 흠을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를 내가 생각했던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완성도와 상관없이 만족한다. 이렇게 말하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영화를 찍지 못해도 좋을 정도다.” 평범한 겸손인지 고도의 자신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네는 이하 감독의 현장에는 은근한 미소가 유행이다. “뭔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없고 뻘짓을 일삼지만 특별히 남한테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감독과 가장 가까운 캐릭터 석규를 연기하는 지진희는, “감독님이랑 눈이 마주치면 서로 웃곤 한다. 서로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며 감독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

시나리오는 재밌게, 영화는 재미없게?

<여교수의…> 최고의 스펙터클이 될 사고장면. 사거리 한복판에 놓인 빈 차를 트럭이 와서 밀어버릴 채비를 마쳤다. “(촬영)들어간대, 들어간대.” 충돌장면을 직접 보기 위해 모니터를 뒤로 한 이하 감독이 다소 흥분한 듯 안영진 PD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장난을 친다. 두번의 테이크 끝에 자동차 한대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다. 그의 졸업영화 전체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간 셈. 이 광경을 목격한 은숙과 석규의 놀란 표정을 정면에서 잡으면 이날의 촬영은 마무리된다. 그러나 가쁜숨을 몰아쉬며 드라마틱한 반응을 보일 것이란 기대는 접는 편이 좋다. 멍한 표정으로 십여초에 걸쳐 꼼짝도 하지 않는 둘의 썰렁한 반응은 이 영화의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하 감독은 대사와 대사 사이의 어색한 시간, 흔히들 전체의 리듬을 늘어지게 만든다고 편집에서 여지없이 잘라내게 마련인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또 다른 리듬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말한다. “시나리오를 최대한 재미있게 써서, 영화를 최대한 재미없게 만들고 싶다”는 그의 설명은 상업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엉뚱한 재미를 담고 싶다는 의도로 들린다. 모자란 듯 풍성하고, 익숙한 듯 낯설게. 그것이 바로 이하 감독이 현장을 지휘하는 방식이고, 완성된 그의 영화가 지니게 될 매력일 것이다.

“뻘짓하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이하 감독 인터뷰

-<질투는 전투다>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지가 꽤 된 것으로 알고 있다.

=2003년 8월에 완성해서, 그해 하반기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됐다. 그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 몇 군데와 미팅을 하던 중 엔젤그라운드를 만났고, 지난해 이맘때 영진위 예술영화지원을 받았다. 실제로 촬영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것이 크랭크업 한달 전쯤이다.

-시나리오를 고치라는 말도 많이 들었을 텐데.

=고치면 펀딩을 해주겠다거나 출연을 해주겠다는 압력이 아니라 영화에 애정을 가진 이들의 충고였다. 엔딩의 황당무계함, 헤픈 여자 캐릭터, 여러 명의 등장인물 중 누가 주인공인지 모르겠다는 점 등에 대한 지적이 있었지만 모두 그 단점들이 또한 내 시나리오의 장점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대대적으로 고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해줬다.

-지금의 시나리오는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나.

=약간 다듬는 정도. 영화의 흐름과 상관없이 해보고 싶었던 장면들이 꽤 많았는데 그런 것들을 정리했다. 지난해 여름경에 제목을 지금처럼 바꿨다. 옛날 제목은 내용과 맞지 않는 면이 있었다.

-원래 제천이 배경이었나.

=지금 영화는 심천이라는 우리나라에 없는 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첫 시나리오에는 제천시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리나라이면서 아니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면서 아니기도 한 느낌을 원했다. 영화에는 그 도시에 바다도 나오고 호수도 나오지만, 이름을 정할 때는 바다가 없는 충북 지도를 펴놓고 도시 이름을 살펴봤다

-영화를 구상하게 된 계기는.

=주요 인물이 많이 나오고 특별한 여자 캐릭터를 내세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실 이 여교수는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다. 그간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다뿐이지. 팜므파탈은 아닌데 착하지도 않고, 보통 여자지만 어딘가 묘하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과거,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지만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과거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사람은 모두 똑같이 산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쟤나 나나 우리나 다 마찬가지니까 봐주자는.

-전작들에는 비루해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이 결국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응원이 느껴졌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인가.

=그게 핵심이다. 뻘짓하고 뻘소리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있다는 걸 이해하자는 거다.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나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이나 이들에게 정을 느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이 사람들을 좋아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전작과 다르지 않은 방식의 응원이다.

-영화를 찍는 환경은 전작과 비교도 할 수 없을 텐데.

=첫 야간촬영을 하는데, 하늘에 달이 뜬 거다. 크레인에 올린 18kW 조명기 말이다. 연출부들은 이미 충무로에서 많이 본 거라서 덤덤한데, 난 그게 너무 신기했고 감동적이었다. 차신 찍을 땐 조감독이 내가 레커차 타고 싶어하는 걸 어떻게 알고 태워주더라. 지미집도 처음 봤는데, 조립하는 걸 옆에서 계속 구경할 정도였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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