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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해야지, 교태만 떨어서 되겠느냐?”
2001-07-19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2 - 복혜숙 하

일정시대엔 여배우끼리 자주 어울렸었지. 나이도 비슷하고 했으니…. 이월화, 신일선, 문예봉이. 그담 좀더 젊은 사람으로는 김정숙, 서화이, 김소영. 뭐 많지.

이월화는 내가 처음 일본서 와서 토월회 할 때 소개받았어. 배우생활도 오래 못했고 나중엔 자살했지. 제주도 색신데 인물이 이뻤지. 또 참 활달해. 처음 만났을 때, 그때 난 농담도 할 줄 모르고 그래서 “아나타”(あなた: 당신) 이래가면서 얘기를 하고 그러니까 나더러 “꼬박꼬박 일본말로 말할 테야?” 이러고. 뭐 이 기집애, 저 기집애 다정시리 굴어서 내가 이상하게 뻔히 쳐다보고 그랬다구. 내가 연극하러 다닌다고 그럴 적에 이월화가 <월하의 맹서> 찍었다구. 그 담에는 <운영전> 하고, <심청전> 하고.

신일선(<아리랑>의 주연 여배우- 필자)이는 내가 나운규한테 보낸 거야! 나이가 어린 여배우를 하나 구해달라 그래서. 근데 걔가 그때 연극에 나갔단 말이야. “극단이 모레 지방으로 떠나기로 했으니 못하겠어요” 이러더라구. 그래서 내가 몰래 서울로 빼돌렸지. “표 사가지고 가서, 나운규를 찾아가거라. 가서 복혜숙 언니가 서울로 가라고 그래서 왔다고 그래라.” 그랬더니 가서 그렇게 인기를 얻었어. 그전부터도 신일선이가 나비춤 춘다고 무대 나와서 요렇하고 그랬어. 그러면 내가 “물론 나비춤도 이쁘다. 하지만두 너 정말 연기를 해야지, 그렇게 교태만 떨어서 되겠느냐? 연극말고도 영화를 하면 더 멀리 선전두 되고 좋을 테니깐드루 그렇게 해라” 그랬었거든. 신일선이는 오빠 때문에 신세 망쳤지. 무대에도 나오고 영화에도 나오고 그러니깐 오빠가 직장도 관두구 걜 쫓아댕기다가 전라도 양아무개한테 팔아먹다시피 했다구.

문예봉(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 해방 직후 월북하여 훗날 인민배우 칭호을 받았다. 이규환 하편 참조- 필자)이도 서방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사내라는 게 <홍도야 울지마라>(원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일제시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신파극이며, 39년 이명우 감독에 의해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필자) 썼던 임선규야. 나중엔 폐병에 걸려서 우리 병원(복혜숙의 남편은 의사였다.- 필자)에 입원을 시켰지. 아이들도 넷인가 다섯인가 있었는데 나더러 할머니, 할머니 그랬다구. 그애들까지 죄다 우리 병원에 들쌓고 와서 내가 밥 다 해멕이고 그랬지.

조경희(<숙영낭자전>의 주연 여배우- 필자)는 참 이쁘구 얌전했다구. 하도 이쁘니깐 말이야, 골려먹을려구 다른 여배우 하나가 걔 버선을 벳겼다구. 예전에 기생방에서는 벌주는 게 치마 벳기는 거하구 버선 벳기는 거야. 그러니 조경희가 모욕당했다고 울고불고 난리났었어. 그래서 내가 “인제 다 개화돼서 모두들 비단 양말 신고 다니는데 버선 벗기는 게 무슨 모욕이냐?” 그러면서 달랬다구.

김정숙(<풍운아>의 주연 여배우- 필자)이는 일제시대 때 아주 날리던 배우유. 별명이 ‘에테테’였어. 말을 똑똑하니 못해. 그래도 무성영화니까 날렸지. 말하는 거 보면 입을 어색하게 하는 거이 뵈요. 그래도 아주 잘생겼지.

김소영이는 연극배우로 나왔다가 <물레방아>(기존의 기록들과 비교해 볼 때, 1931년작 <방아타령>으로 추측된다.- 필자)에 나가고, 최인규가 하는 <국경>이라는 걸 하고 또 여러 가지 했지. 동양극장에도 있었어. 소영이도 목사 딸이야. 연극, 영화 하는 사람들 중에 교인이 아주 많아. 나중엔 조택원(무용가, 중편 참조- 필자)이하고 미국 갔는데 그놈 때문에 고생 엄청 했대.

결혼과 이별, 그리고 끝없는 연기공부

여배우들이 다들 고생 무척 했지. 나도 김 박사(복혜숙의 남편이었던 의학박사 김상진- 필자)랑 서른한살에야 결혼을 했어. 결혼한 해에 딸을 낳았지. 아이가 들어섰는데 저이가 박사 될 때라 쉬쉬 했지. 그랬다가 내중에 입적할 적엔 변호사대서 친자확인소송까지 했다구. 해방되고 영감이 서울대 교수로 들어왔을 때는 내가 도서관 댕기면서 맨날 독일 책 베껴다 줬다구. 내가 영어는 좀 알지만서두 독일어는 하나도 못하거든. 그래도 어디서 어디까지 베껴오래면 고걸 콤마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적어가지구 갔지. 참 사서들도 열심히 한다고 그러더구만. 내가 비너스 할 적에 우리 영감이 아주 열을 올렸었지. 근데, 늙으면 다 소용없어. 쉰여섯살 적에 헤어졌나? 내가 그 집을 나오면서 쫓겨났던 큰마누라 데려다 놓고 그랬다구. “내가 시집올 때 해가지고 온 살림들이지만, 다 두고 나가우. 나 때문에 당신이 나갔었으니깐 이젠 들어와서 집 지키시우. 저기 딴 예네가 들어올려고 그런다우.”

참, 저 방송극 했던 얘기를 안 했구만.(라디오 방송극은 조선총독부가 경성방송국을 설립하면서 2년여의 시험방송 기간을 거쳐 1926년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무렵 복혜숙은 아나운서를 지도하거나 드라마에 출연하였다.- 필자) 내가 시골로 순회공연 다니느라고 맨 처음에는 못했고, 25년부터 했지. 나중에 제1방송, 제2방송이 생겼는데, 저 심훈씨 형님 심우섭씨가 복혜숙이가 아니면 몰른다, 그래서 하게 됐지. 처음에는 한국말로 했는데, 내중에는 드라마도 일본말로 하라 그랬어. 그 일본말, 하라 그래서 하니까는 못 하겠어. 그래서 “하도 오래 되구, 이젠 나이가 먹으니깐드루 안 되는군요” 그러구 안 했어. 그때 방송은 극단 극우회 사람들이 맡았는데, 삼십분짜리 단막극 라디오 드라마로 각색을 했다구. <새벽 종소리>라는 걸 했어. 거기서는 내가 열두살 먹은 소년 역을 했지. 근데 식자가 우환이라더니, 사람들이 마이크에 입김 들어가면 감전돼서 죽는다잖아? 그땐 첫 번째 사람이 마이크 앞에 똑바루 서서 말 한마디 하면 다음 사람이 또 마이크 앞에 가서 하구 그랬다구. 근데 나는 그거 싫어서, “아저씨! 아저씨” 그런 대사를 다른 사람들 어깨 너머서 했지. 내 생각엔 말이지 ‘습하면 감전되어 죽는다는데 쪼끔 멀리 하면 괜찮겠지.’ 그래서 인제 그렇게 했더니, 감청실에서 들어봔 사람이 “아니 그 어쩌면 그렇게 거리감 있게, 멀리 느껴지게 (마이크를) 잘 두느냐?” 날더러 그래. (웃음)

내가 참 여러 선생님들한테 많이 배왔어. 홍노작 선생님(홍사용, 작가- 필자)이 토월회 계실 적에 내가 공부 많이 했지. 그때는 학교 작문하듯이 일주일에 한번씩 화제(話題)를 내셔. 창 밖을 보며 지나댕기는 사람들 보고 글을 쓰라구 그러신다구. 밤낮 알밤을 맞으면서도 열심히 썼다구. 그래두 선생님이 나더러 “넌 공부하면 정말 장원하겠다” 그러셨는데….

이서구씨(시나리오 작가- 필자)한테서도 참 도움 많이 받았지. 내가 신파극단 댕길 적에 그이는 신문기자 했어. 어떤 때는 연습하는 거 와서 보곤 했지. 우리가 점심도 못 먹고 있으니 아주 가엾은가봐. 호떡을 사서, 창문으로 툭 던지구 가요. 다들 “누가 그랬지?” 그러면서 내다보지. 웬 커다란 이가 휘이 저으면서 절루 돌아가는 게 보여. 그럼 다들 “이서구 선생님이 그랬지 누가 그래” 그러지. 이 선생님 부인한테서도 도움을 참 받았는데 내가 이럭하구 바쁘게 돌아다니니깐 돌아가신 다음에도 못 가 뵐 뿐….

춘원 선생님은, 내가 토월회 있을 적에 <무정>, 또 <흙>, 뭐 그런 걸 무대극으루 많이 하면서 친교가 됐지. 내외분이 다 보러 오셔서 아주 좋아하시구. 나중에 선생님이 몸이 아프셔서 인천에 무슨 별장에 가서 계실 때, 그래도 비너스까지 와서 약주 잡숫구, 저녁 잡숫구 그러셨다구. 그러면 내가 어떨 땐 모셔다까정 드리고. 그리구 또 (속삭이듯) 내중에 말썽이 많았잖아요? 무슨 독립운동 했다고 붙들려 오구 그럴 적에는, 초대 경찰청장 한 이가 우리 친척이거든, 그래서 좀 봐주셨지. 또 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필자)에 걸렸을 땐 내가 변호사들한테 죄다 얘기해줬지. 나중에 그 부인이 영감한테는 말도 않고 고맙다며 양복감을 가져왔다구. 그거 가만히 놔뒀다가 6·25 난 다음에, 1·4 후퇴 때 도루 갖다드렸다구. “이거, 말도 못하구 그냥 받아놨다가 도루 가져왔으니 쓰시오.” 그거 요긴하지. 그때 영감은 납치돼 가구, 살림은 모두 몰수당하구 그랬으니 좀 하우겠수? 뭐, 사연이 많아.

“배우도 많이 배워야지”

내가 후배들더러 늘 그러지 않아? 칠판 밑에서 배우는 것만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남의 것 듣고, 보고, 외국에도 나가봐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위원 됐을 적에 최무룡이를 미국 보내달라구 그랬어, 내가. 그랬더니 “아주머니나 좀 갔다오시죠. 왜 그러세요?” 그래. “늙은이가 가서 뭘 하우? 젊은 아이들이 가서 다 배워와야죠.” 그랬더니 “지금 이 난리 속에 어떻게 하겠느냐. 나중에 다…” 그러더라구. 윤정희가 제 석사 논문에다가 내가 일본에서 무슨 연기학교 다녔다 그랬는데 그건 아니지만, 그거 욕할 게 아니야.(이영일 선생이 복혜숙과 인터뷰하던 당시, 윤정희는 전문적이고 지적인 여배우로 평가되면서 다른 배우들과 차별되었다. 복혜숙은 윤정희가 쓴 한국 여배우를 다룬 학위 논문의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 복혜숙이 다녔던 요코하마여자기예학교는 연기학교가 아니라 수예학교였다. 상편 참조- 필자) 그건 몰라서 그러는 소리구. 난 윤정희 참, 칭찬한다구. 배울려고 애 쓰는 거. 배우도 많이 배워야지.

정리 최예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shoooong@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