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코스트너와 케빈 레이놀즈, 이 두 케빈은 서로 제법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던 스타와 감독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최소한 <워터 월드>(1995)를 제작할 당시 편집과 내용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영화의 개봉을 불과 석달 남짓 남겨두고 레이놀즈가 메가폰을 손에서 놓기 전까지는. 90년 로빈 후드의 모험담을 다룬 영화를 만들겠다는 여러 영화사들로부터 제의를 받은 코스트너가 굳이 모건 크리크사의 <의적 로빈 후드>(1991)에 출연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 프로젝트에 레이놀즈가 감독으로 내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코스트너는 레이놀즈의 액션 시대극 <라파 누이>(1994)에 제작 총지휘(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하기도 했다. 레이놀즈의 감독 데뷔작인 <판당고>는 바로 이 두 케빈의 이 같은 ‘우정’의 출발점이라고 보아도 좋을 그런 작품이다.
<판당고>는 정치 연설 작가로 일하다가 뒤늦게 영화에 눈을 돌린 레이놀즈가 USC에서 수학할 때 만든 단편 <시험>(Proof)을 장편으로 다시 만든 성장 로드 무비. 베트남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71년, 텍사스 오스틴의 난장판이 된 한 졸업 파티장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저조한 성적 때문에 징집 대상에 오른 가드너와 입영 통지서를 받고는 예정된 결혼식마저 갑자기 취소하기로 마음먹은 와그너는 소리를 지르며 고속도로로 뛰쳐나간다. 레스터, 도어맨, 필이 가세한 이 일행은 멕시코 국경을 향해 질주한다. 마치 그곳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다가올 두려운 미래로부터의 도피가 동일한 것이라는 듯이.
<판당고>는 베트남전이 상징하는 ‘거대한 현실’과 맞닥뜨린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것과 싸우지 않고 ‘필사적으로’ 벗어나 볼 것인가를 다룬 영화인 것처럼 시작한다. 이를테면 브라이언 드 팔마의 코미디 <그리팅즈>(1968)의 주인공들이 베트남에 가지 않으려면 어떤 얄팍한 수를 써야 할까를 아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데 비해(‘호모’로 가장하면 어떨까? 아니면 호전적인 공산주의자로 보이면 되나?) <판당고>의 주인공들은 그 방법으로서 안일하게도 일시적 도피를 택한다는 것. 공동 묘지에서의 불꽃놀이가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전장(戰場)처럼 바뀌는 장면은 이 주인공들의 전쟁·현실로부터의 강박관념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80년대에 만들어진 <판당고>는 ‘외부’(!)에서의 전쟁이란 현실이 아니라 단지 청춘의 노스탤지어를 자아내기 위한 일종의 매개 같은 것에서 그친다. 이후 주인공들이 밟아나가는, 때로는 코믹하고 때론 위험하기도 한 해프닝의 행로란 “지나간 청춘은 이제 다시 올 수 없도다”식의 아련함만을 일깨우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젠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깨우칠 차례가 왔다. 주인공들은 결혼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와그너의 결혼식을 올려줄 ‘임무’를 수행한다. 그 속에서 보일락 말락 자태를 드러내는 애련의 그림자. 그리고 멋지게 할 일을 완수한 주인공 가드너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신비스런 영웅의 면모까지 보여주고… 맨 엉덩이를 드러내던 조롱의 태도도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린다. 젊음의 치기와 무모함으로 미국을 돌파할 것 같았던 <판당고>는 <이지 라이더> 식의 이야기이긴 하되(스티븐 울프의 <Born to Be Wild>도 나오니까) 순화한 코믹 버전의 <이지 라이더>이다.
배우 케빈 코스트너
우리시대의 게리 쿠퍼
케빈 코스트너(1955∼)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슈퍼 스타’의 지위를 확고히 지킨 인물이다. 잘생긴 외모에 침착함과 성실함을 새겨 넣은 금욕적인 영웅을 주로 연기한 탓에 그는 흔히 ‘우리 시대의 게리 쿠퍼’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또 한 가지 코스트너의 뚜렷한 표식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영화계의 베이스볼 맨이란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열아홉번째 남자>(Bull Durham, 1988)와 <꿈의 구장>(1989)에서 각각 마이너리그의 과묵한 야구 코치와 자신의 옥수수 밭을 야구장으로 만들려는 의지의 사나이 역을 맡았던 그는 최근에도 샘 레이미가 감독한 야구 영화 <포 러브 오브 게임>(For Love of the Game>(1999)에 출연했다.
대학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나서 영화계로 발을 옮긴 뒤 단역을 전전하던 코스트너는 로렌스 캐스단의 <실버라도>(1985)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역을 맡게 된다. 이후 <노 웨이 아웃>(1987) <언터처블>(1987) 같은 히트작들에 출연하면서 당대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코스트너는 배우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야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인디언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시각을 보여준 첫 감독작 <늑대와 춤을>(1990)은 주요 오스카 트로피를 휩쓸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배우로서 주가가 많이 떨어진 코스트너는 감독으로서도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주연과 제작자로 참여한 <워터 월드>의 실패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은 코스트너가 97년에 심기 일전해 만든 <포스트 맨> 역시 혹평만을 안겨주어 그와 그의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