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먼길을 오셨는데, 마침 내가 시간이 없어서 만나 드리지는 못했다. 이때를 맞춰 대우에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대량 물량공세에 나섰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봐도 “데∼우, 데우 운트 두”(대우, 대우와 너)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한적한 동네 귀퉁이 벽에도 대문짝만한 대우 광고가 붙어 있었다. 대우의 세계경영을 나는 이렇게 광고의 물량공세로 기억한다.
‘아시아’라 하면 ‘소림사’부터 떠올리는 유럽인들은 아시아의 것은 뭐든지 신비롭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선지 그들에게 대우의 이해할 수 없는 성장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그때 그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기업은 이윤을 내야 하는데, 어떻게 이윤을 내지 않는데도 고속으로 성장을 하느냐?” 대우가 일거에 몰락하면서 이 놀라운 권법의 비결이 드러났다. 분식회계, 사기대출, 불법외화유출.
대우가 온 세계에 태극기를 꽂고 다닐 때 이를 열심히 찬양하던 분이 있었다. <월간조선>의 사장을 지낸 조갑제씨다. 세월은 많이 흘렀어도 그때 이분이 썼던 글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그가 국내외에서 거느리고 있는 기업의 거의 전부는 창업한 것이 아니라 사들이거나 합병하여 만든 것이다. 이는 유목민족적인 기업관이다. 군사력만 있으면 농경민족을 쳐부수어 나라를 빼앗고 거기에 내 나라를 세우면 될 것이지 굳이 농토와 국토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칭기즈칸이 몽골을 본부로 삼아 세계정복에 나섰듯이 김 회장은 대한민국을 본부로 두고 세계경영에 나서고 있다. (…) 582개의 해외법인, 지사, 연구소, 건설현장에 본부에서 파견돼 21만명의 이민족을 관리하고 있는 한국인은 약 2300명이다. 100만 몽골인이 그 100배의 인구를 지배하였듯이 대우도 일당백이다.” 각본의 이 거대한 스케일을 보라. 김우중칸의 활약을 사극으로 만드는 거다. 그럼 할리우드가 만든 <트로이>를 뺨치지 않을까?
“김우중 회장은 (…) 말과 활에서 나오는 몽골 기마군단의 기동성을 총수의 발빠른 정상외교에 의한 진출지 선점과 직관적인 의사결정, 놀라운 해외금융 동원력으로 대체한 사람이다. 칭기즈칸이 세계 정복에서 기마군단을 주력으로 삼았듯이 김우중은 자동차 산업을 해외진출의 선봉으로 내세우고 전자·통신, 건설, 무역·금융을 공병과 보병처럼 뒤따라 붙이고 있다.” 보라, 전쟁물의 요소도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 다시 찍어야겠다.
“칭기즈칸 전략의 핵심인 기동성을 기업화”하여, 전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던 세계경영의 귀재 김우중칸. 그가 마침내 귀국을 했다.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받겠다고 벼르는 모양이다. 은닉재산을 추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자 그의 측근들이 외친다. “김 전 회장이 가진 것은 팬티 한장뿐이다.” 팬티만 입은 김우중. <몽정기3>의 소재로 손색이 없지 않은가.
대우맨들은 지금 열심히 그의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얘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모양이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김우중 일병 구하기> 정도라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속편 노릇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뿐인가? 걸어다니는 김우중 리스트, 한나라당 이한구의 의원의 말을 들어보라. “김 전 회장의 귀국으로 잠 못 자는 이들 많을 것이다.” 이 정도면 납량특집, 한여름의 오싹한 호러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의 귀국은 정치면이나 경제면이 아니라 문화면에서 다뤄야 할 소식이다. 액션물, 전쟁물, 역사물, 코믹물, 공포물. 모든 장르에 영감을 제공해주는 그의 귀국은 잠시 머뭇거리는 한국영화의 한계를 돌파해줄 위대한 영화사적 사건인 것이다. Enjoy this fil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