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첫째-둘째-셋째 이론의 신봉자였다. 없는 이론이지만, 난무하는 혈액형 이론보다 강하게 믿었다. 살면서 겪은 게 있어서다. 우리집은 자녀가 1남2녀로 구성돼 있고 나는 그중 첫째다. 막내는 물론 아들이다. 차녀는 (어쨌거나 태어난) 장녀와 (꼭 있어야 하는) 아들 사이의 징검다리다. 첫째-둘째-셋째 이론은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 간단히 설명하겠다. 첫째는 일단 책임감이 강하지만 반항심도 강하다. 부모의 간섭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학을 많이 한다. 책임감과 반항심의 괴리를 극복하려다 생긴 습관이다. 눈치가 없어서 반항심에 나쁜 짓을 하면 꼭 걸린다. 첫째는 자기가 둘째의 인생 모델이라는 걸 눈치 못 채고 둘째를 라이벌로 여긴다. 둘째는 사교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100단이다. 첫째와 막내 사이에서 화목하려다보니 생긴 기술이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타입이며, 부모 관심권 밖에 살아서 자유분방하고 자립심이 강하다. 흔히 둘째는 “사막에 갖다 놔도 잘산다”고 한다. 셋째는 잔머리를 잘 쓰는 애늙은이다. 눈치는 300단. 연상들하고만 부대껴 자라서 의외로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자기 혼자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윗사람에게 예의갖추는 건 정말 잘하지만 웬만해서는 속으로 존경심까지 품지 않는다(이건 첫째도 마찬가지다. 다만 첫째는 셋째보다 덜 약아서 어느 순간 상대를 확 믿어버리는 짓을 한다). 책임감이 강하다. 그러나 셋째의 책임감은 타자(부모)의 존재로 인해 생기는 첫째의 그것과 다르다. 자신은 이미 어른이므로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도 문제없다는 자신감의 발로다. 둘째처럼 자기 영역이 분명하지만 둘째의 것은 생존에서 나왔고 셋째의 것은 남들은 자기 세계를 이해 못한다는 나르시시즘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변수가 있다. 첫째가 좀 유순하거나 내성적이면 둘째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기질에 변화가 생긴다. 첫째가 형일 경우엔 막내아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셋 다 동성이면 또 달라진다. 그래도 난, 이 이론을 정립하기 시작한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집에서 몇째?” 하고 꼭 물어봤다. 상대방이 “몇명 중 몇째”라고 대답하면 머리를 굴려 그 사람의 성격을 미리 파악해보곤 했다. 그러고나면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받아들이기 편했다. 케이스 하나 갖고 가내에서 정립한 거라 애초 적용 불가능한 이론이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유형화하고 추후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지속 관리하는 데에는 편리했다. 대부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고 혼자 믿었고, 예외가 되는 경우는 (헷갈려지니까) 관심을 껐다.
모든 이론의 끝이 그러하듯, 이 이론도 무너졌다. 부합하는 사례보다 예외가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잃어버리고 나자 사람을 대하는 게 혼란스럽고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판단의 도구라는 게 얼마나 편리한 것인가도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근 2년을 방황하다 요즘 새로운 틀을 얻었다. 바로 혈액형이다. 약간의 관심을 갖고 주변을 관찰하다보니 A형, B형, AB형, O형이 그럴듯하게 분류가 되는 것이 아닌가. 혈액형 이론의 인기 비결을 이해했다. 그러나 4진법은 (3진법이 멸망한 전례도 있으므로) 너무 위험하다. 난 여기에 ‘남자는 화성, 여자는 금성’ 이론을 추가하고 구이론을 조화시켰다. A형에 남자인데 첫째라면…. 경우의 수는 많아지고 이론은 정교해졌다. 기준이 없어져서 방황하던 시기에, 살다 보면 이렇듯 편견의 틀이 없어지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구나 했다. 웬걸. 편견의 기준은 진화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