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면서 따뜻하다. 엄격하면서도 자유롭다. 속됨 속에 성스러움이 있다. 작가 노희경의 작품은 늘, 이율배반적인 단어의 조합으로 형용된다. 지난 3월 방송된 한국방송 창사특집극 <유행가가 되리>도 다르지 않았다. 싸구려 ‘유행가’처럼 유치 찬란한 중년 부부의 삶은 초라하고 누추했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었다. 김철규 피디 말마따나 “제 나이보다 세상을 이삼십년을 더 겪어본 듯한 노희경 작가의 혜안과 통찰력”이 박근형·윤여정 두 걸출한 배우의 농익은 연기와 어우러졌다. 지난 15일 상하이 국제 티브이 페스티벌에서 ‘매그놀리아 대상’과 ‘최우수 극본상’을 받게된 것도 그래서다.
<유행가가 되리> 방영을 앞두고 지난 2월말 칼바람이 매섭던 여의도에서 만난 지 100여일만에, 23일 오후 다시 그와 마주 앉았다. “언제나 운이 좋습니다. 다음엔 실력으로 하겠습니다.” 겸손한 수상 소감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얼굴만 바꾼 거에요”
<유행가가 되리>에 표현된 중년 부부의 일상을 보고 적잖은 이들이 궁금해 했다. 66년생 작가가 어쩌면 그토록 사실적으로 공감되게 그렸냐는 것. 노 작가는 “박근형이 나고 윤여정이 나예요. 얼굴만 바꾼 거죠”라고 담담히 말한다. “아버지는 비루하고 초라하고 가식적이고, 엄마는 위선적이고 이중적이고…. 그런 모습이 나한테도 있거든요.”
“비루하고 위선적인 극중 인물은 내 모습 팬 비위 다 맞추진 않아 쓰고 싶은걸 쓸 뿐”
작가의 감춰진 모습이 작품에 드러났다는 말이다. “내게 없는 모습을 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노 작가의 작품엔 그의 삶의 경험이 깊이 자리하고 있다. 여느 보통 사람들처럼, 평탄치 않은 가족사를 지닌 작가의 경험은 크고 작은 드라마의 소재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의 드라마의 큰 주제도 그렇다. 그가 겪고 몸부림 친, 뿌리 깊은 애증과 이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고통이 진정한 화해와 사랑으로 이어진다. “가족을 제 드라마가 중요하게 다루지만 자꾸 싸우게 만드는 것은요, 싸울 수 있다는 건 화해라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예요. 가족 문제를 풀려면 가족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어떠해야 한다고 보면 안 되거든요.”
오랜 시간 생활화된 관찰과 취재도 그의 드라마가 가진 힘이다. “사람 감정 같은 거는 일시적인 취재로 안 돼요. 관찰밖에 방법이 없죠. 오늘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눈을 보고 말하면, 왜 그러지? 하고 생각하고 적어요. 자기 전에 메모지 놓고 메모를 죽 하다 보면 1년이면 수첩 한 권이 미니시리즈 한 편이 되죠.”
“명상하고 절 하고…”
2002년 <고독>을 마치고, 그는 ‘마음 공부’를 시작했다. 절에 들어가 마음을 내려놓고, 명상에 들어갔다. “하심(下心)하려고 겸손해지려고” 시작한 108배는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부처님한테 하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하는 거죠. 너 똑바로 살아라, 하는 식으로요.”
그러다가, 300배로 는 것이 100여일 째다. 힘겨운 일이 생겨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얼굴을 본”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 드라마에서도 드러나 듯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의 작품이든 삶이든 엄청난 무게를 차지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10여년 그의 드라마는 아버지와의 화해로 가는 길을 보여줬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렵게 용서하고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아버지를 놓아줄 때가, 너무나 빨리 왔다. “300배는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할 거예요.” 잠시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가족을 향한 시선을 인간 일반에게 확대시킨 작업이 노 작가의 드라마다. 그래서 그는 줄곧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열망하다가 “미운데 어떻게 안 미워해? 화나는데 어떻게 화를 안내? 물 흐르듯 많은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을 바랐다. 그리고, 여러 작품들을 하며 “이런 인간도 있고 저런 인간도 있다. 이해하지 못할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르렀다. “지금도 찾아가는 중이지만….”
“독약·마약은 팔지 말자”
물신이 지배하는 척박한 시대, 사람에 천착하는 노희경 작가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적어도 시청자들한테 독약이나 마약을 파는 일은 하지 말자”는 작가적 순결성은, 경박한 트랜디물의 범람 속에 돋보인다. 그가 한국방송 드라마를 주로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돈은 적어도 마음은 편한 곳이 케이비에스죠. 아직 이쪽엔 양반 기질 같은게 있어요. 함부로 조기종영하고 하는 일은 없죠. 2000년 <바보같은 사랑>이 시청률 1%가 나온 적이 있었어요. 다른 방송사 같으면 당장 내렸겠죠. 그런데도 ‘작품이 좋지 않냐’며 밀어주더라고요.”
꿋꿋이 작가적 자존심을 지키며 써온 작품 덕일까, 98년 <거짓말> 이후로 마니아층이 모였다.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팬들의 비위를 다 맞추진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한동안은 부담스럽고 힘들 때가 있었죠. 이젠 다 맞출 수 없다면 맞추지 말자고 생각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편하게 생각해야죠. 생긴 대로 써야지 방법이 없잖아.”
독특한 사랑이야기에 푹 빠진 팬들은 가족이나 노년의 지루함을 다룬 이야기를 낯설어 했고, “노희경이 변했다”고 서둘러 서운해하기도 했다. “다시 멜로를 써도 ‘똑같애, 달라진 게 없어’ 그럴 거에요. 방법이 없죠. 내가 쓰고 싶은 걸 쓸 뿐.”
다음해 초 방영될 미니시리즈는 사랑이야기 <굿바이, 솔로>(가제)다. <꽃보다 아름다워>의 공동연출자였던 기민수 피디가 연출에 나선다. 스토리 위주 드라마와 달리 같은 장소를 매개로 주인공 6명의 각자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새로운 틀이다. “인생은 아름다운 미스테리라는 걸 담고 있어요.”
작가 인생 10년, 이번 작품 또한 삶에 지치고 사람에 다친 이들에게 ‘보약’이 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