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쯤, 한 방송사의 설날 특집 만화. 미래를 배경으로 한 그 만화에서 한 여자가 외계에서 온 희귀한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주인공은 치료약을 찾을 때까지 여자를 냉동시키기로 하고, 치료약을 찾기 위해 넓디넓은 우주 공간으로 모험을 떠난다. 내용의 대부분은 남자가 이곳 저곳의 행성에서 외계인을 만나 겪는 모험담으로 채워졌지만, 충격적인 것은 결말 부분이었다. 남자가 찾아온 치료약으로 바이러스를 이기고 냉동 상태에서 풀려난 여자는 남자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알고보니 그는 남자주인공의 아들. 치료약을 찾는 데 20여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주인공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치료약을 찾아 여자를 깨어나게 하기만을 기다린 시청자에게 백발이 성성한 주인공의 쓸쓸한 뒷모습은 가슴아픈 반전 그 자체였다.
<아톰>을 만든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데즈카 오사무가 1986년 만든 <은하탐사 2100년: 보더 플래닛>은 독특한 내용으로 그렇게 한국의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2005년, 이제 그 만화적인 상상력이 드라마를 통해 재현된다. <러브홀릭> 후속으로 6월27일부터 방송되는 <그녀가 돌아왔다>는 냉동인간이라는 소재와 시대를 뛰어넘어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 만화와 닮았다. 하지만 여자가 깨어난 뒤 벌어지는 갈등 상황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이를테면 만화 ‘그 이후의 이야기’인 셈이다.
1979년, 영화감독을 꿈꾸는 의대생 하록(박진우)과 소령(김효진)은 소령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결혼식 전날 밤 심장이 좋지 않았던 소령은 돌연 심장마비로 쓰러지고, 의대 교수이자 저온생물학 박사인 소령의 아버지(정욱)는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언젠가 반드시 살려내리라 결심하고 소령을 냉동시킨다. 그리고 25년의 세월이 흘러 2005년, 소령은 기적처럼 다시 깨어나지만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기억을 잃은 상태다. 소령은 병원에서 만난 레지던트 민재(김남진)와 사랑에 빠지지만, 민재는 이제는 실패한 영화감독이자 일상에 찌든 40대 이혼남인 하록(김주승)의 아들이다. 하록의 도움으로 영화배우가 되는 기회를 잡고 현실에 적응해가던 소령은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보면 <그녀가 돌아왔다>는 상당히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현실 가능성 여부에 대해 문제제기가 있을 것이 분명한 ‘냉동인간’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도 그렇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두고 사랑쟁탈전을 벌인다는 내용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연출이 <낭랑 18세>를 만들었던 김명욱 PD라는 점을 감안하면 예상은 조금 달라진다. 엘리트 검사와 천방지축 여고생의 억지 결혼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유쾌발랄하게 풀어냈던 김 PD는 <그녀가 돌아왔다>에 대해서도 “정통적인 방법으로 무겁게 그려나갈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냉동인간에 대해서도 과학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현실화된 예가 없는 만큼 드라마적 장치로만 사용할 뿐 깊이있게 파고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가 강하고 감정이 짙은 내용이지만 부담없이 재밌게 볼 수 있도록 경쾌하게 그리겠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80년대풍의 고전적이고 단아한 사랑과 현대의 솔직담백하고 발랄한 사랑, 두 가지 색깔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버무리겠다”는 것이 <그녀가 돌아왔다>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김 PD의 기획의도다. 김 PD는 여러 논란거리에 대해서도 “일단 드라마를 보면 진정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독특한 드라마가 될 <그녀가 돌아왔다>를 시청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배우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냉동인간으로 시대를 뛰어넘은 여자 소령, 쉽지 않은 배역을 맡은 김효진은 세월의 변화를 표현하기 위해 긴 생머리를 자르고 고슴도치 같은 삐죽 머리로 등장한다. <홍콩 익스프레스>에서의 호연으로 ‘김효진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는 “그동안 약간 어두운 역할을 하다가 이번에 순수하고 밝은 역할을 하게 돼 기쁘다”며 “단순히 가볍지만은 않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겠다”라고 말했다. 민재 역을 맡은 김남진 역시 이번 드라마에서 연기 변신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다. 그동안의 진중하고 과묵한 이미지를 벗고 밝고 쾌활한 바람둥이 연기를 보여줄 그는 “지금까지 맡은 배역 중 실제 나와 가장 가까운 배역”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서 반가운 얼굴은 하록 역으로 등장하는 김주승이다. 1980년대 청춘스타로 이름을 날리다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그는 <올드보이> 오대수 같은 부스스한 머리에 40대 남자의 고뇌를 표현해 냉철하고 차가운 이미지를 확 바꿀 예정이다. “오랜만에 출연하는 작품이라 개인적으로 의미와 각오가 남다르다”고 말한 그는 “드라마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며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제작진과 출연진 모두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지만, <그녀가 돌아왔다>의 앞날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이 드라마가 편성된 월화 드라마 시간대는 현재 <패션 70’s>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 전작인 <러브홀릭>이 10%도 채 안 되는 저조한 성적으로 막을 내린데다 MBC에서 7월4일 시작할 <변호사들> 또한 김상경 등의 출연으로 만만치 않은 상대라 고전이 예상된다. 하지만 김명욱 PD는 <대장금> 열풍 속에서도 <낭랑 18세>를 20% 가까운 시청률로 끌어올린 저력이 있다. “매번 악조건 속에서 시작하는 것이 내 숙명인 것 같다”며 “상대적인 경쟁보다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더 신경쓰겠다”는 김 PD의 뚝심에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