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아들딸, 여기에 다 모였네
호러영화 커뮤니티 ‘호러타임즈’
웅웅거리는 전기톱을 든 살인마가 구석에 몰린 핫팬츠 차림의 여주인공에게 야수처럼 달려든다. 이쯤되면 나올 만한 비명. 객석에서는 소식이 없다. 얼음, 캔, 나무선반 온갖 집기를 두동강내던 살인마가 자신을 토막내려는 순간, 벌벌 떨던 여주인공은 뜬금없이 이렇게 말한다.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요?” 벽에 기대기도 하고 발을 쭉 뻗기도 하며 삼삼오오 영화를 보던 호러팬들은 허탈함에 살짝 키득거릴 따름이다. 그들은 호러영화 커뮤니티 ‘호러타임즈’의 회원들. 세 번째 상영회를 위해 이곳 오!재미동에 모인 그들 앞에 고영남 감독의 <여자, 여자>에 이어 텍사스 오스틴 출신 토브 후퍼가 1986년에 만든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2>가 스크린에 흐른다. 과장된 비명이나 웃음은 호러타임즈 상영회에는 거의 없다. 그저 고요하게 ‘프란체스카’처럼 화면을 응시할 뿐이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대부분은 천천히 상영관 앞으로 걸어와 조심스럽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 호탐 상영회 맞아요?” 그리고, 상영을 기다리며 일렬로 앉아서도 각자 무엇인가를 꺼내서 읽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많은 편. 성균관대 앞 카페 지오에서 개최되었던 두번의 상영회보다 “의자가 상대적으로 불편했고, 쉬고 기다릴 때 마땅히 앉을 장소가 부족하고,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스크린이나 상영 자체는 더 좋아졌으니 만족한다”는 것이 회원들의 중평이다. 윤한빈(26)씨의 말처럼 “대체로 고어영화를 좋아하는 분이 많다”는 성향과 극도로 차분한 관람 분위기는 묘하게 대조적이다.
호러타임즈를 아시나요?
‘호러타임즈’(horrortimes.net)는 2003년 2월에 만들어져 단기간에 회원 1만명을 넘기며 네티즌의 이목을 끌었다. 타임즈라는 동호회명은 “처음부터 목적없는 오프모임은 갖지 말고, 콘텐츠를 쌓으려면 웹진 형태가 적합하다”라는 판단에서였다. 애초부터 이곳은 상영회나 모임보다는 글쓰기를 목표로 했다. 대형 포털이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의 카페가 아닌 독자적인 호러영화 동호회로 자리매김할 무렵, 운영자 호러비(혹은 코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안식을 절대 찾지 말라”는 문구와 함께 갑자기 사이트를 폐쇄한다. 그 사건은 한 회원의 회상처럼 “이게 웬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었고, “1년 넘도록 공동운영자였던 사람도 영문을 모르더라”는 후일담처럼 상황은 당혹스럽게 전개되었다. 이곳에 애착을 가진 일군의 사람들이 다음카페로 대피를 결정했고, 이후 사이트가 폐쇄된 지 3개월 만인 2004년 7월18일 호러타임즈는 재기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호러타임즈에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인터넷 주소가 닷컴에서 닷넷으로 변했고, 회원 수가 7천명으로 줄어든 정도. “호러타임즈가 리뉴얼된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아직 많을 것”이라고 현 시솝인 허지웅(26)씨는 설명한다.
허씨는 <씨네21> DVD 필자인 김종철씨가 만들어 유명해진 호러존, 그것이 변화한 호러익스프레스, 호러피아 등을 섭렵한 호러영화 커뮤니티에 관한 한 잔뼈가 굵은 마니아. 오마이뉴스 영화 분야 시민기자이기도 한 그는 “호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은 내게 영화가 무엇인가와 동일한 질문이다. 예전에는 호러영화를 좋아한다면 취향이 말초적이거나 극단적이라거나 싸구려 같다고들 했다. 그런 고정관념에 반박하고 싶었다”라고 호러에 빠져든 동기를 설명했다. 원래 호러소설과 영화에 묻혀 살았던 그는 호러영화 커뮤니티에 대해 “호러영화 마니아의 특징이라고 못박기는 어렵지만 약간 극단적인 면이 있다. 아주 보수적이거나 아주 진보적이랄까. 논쟁이 자주는 아니지만 한번 붙으면 재미있고 화끈하게 붙는 이유도 그러한 호러에 대한 자존심과 반골 기질이 발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호러타임즈의 공식적인 오프 모임은 상영회로 한정된다. 굳이 영화동호회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커뮤니티들이 지나치게 오프라인 모임을 자주 가져 발생하는 문제를 감안한 방침”이라고 허씨는 밝혔다. 호러타임즈의 오프모임은 “목적없이 만나지 말자”가 슬로건이다. 농담삼아 허씨는“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은 가급적 막으려 한다”고 말했다.
호러의 전복성, 참을 수 없는 매력
그러나 이런 치열한 감시의 눈길을 뚫고 커플로 탄생한 사람들도 있다. 첫 상영회 이후 연인이 되어 100일을 눈앞에 둔 박선미(25), 박상철(27)씨가 그런 경우. 게임디자이너인 박선미씨는 “어린 시절 TV에서 보던 호러물들을 무서워서 싫어하던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무섭지만 묘한 매력에 이끌린” <엑소시스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이후 <좀비오>를 비롯하여 비디오로 볼 수 있는 작품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박상철씨는 ‘호러의 전복성’에 매료되었다. “표현에 있어 폭력이든 고어든 러브신이든 거침이 없다는 점이 처음에는 좋았다.” 그리고 “호러는 기본적으로 착하지 않다. 그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유년기에 친구의 삼촌이 빌려온 에로틱한 홍콩 공포영화인 <미녀의 영혼>이 그의 입문작이다. 이날 상영회에서 고영남 감독의 <여자, 여자>를 공수한 요리사 이준환(30)씨는 한국 공포영화물에 일가견을 가졌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82> <여곡성> <깊은 밤 갑자기> 등이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호러타임즈도 예전에는 영화 파일을 공유하고, 자막 작업하는 팀도 따로 있었다. 초기에 급격하게 늘어났던 인원 중에는 “그저 영화를 다운받기 위한 사람도 꽤 많았다”고 동호회에서 2년 이상 있었던 멤버들은 귀띔한다. 그러나, 현재는 저작권 문제를 고려해 파일 공유는 제한한다. 이에 대해 “개봉도 어렵고 DVD를 구하기도 힘든 호러영화의 상황을 감안하면, 저변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파일 공유가 막힌 점은 아쉽다”라고 현실론을 제기하는 회원도 있다. 결론적으로 많은 호러영화 커뮤니티 중 호러타임즈는 처음에 강조했던 글쓰기와 콘텐츠라는 자신의 특성으로 되돌아가는 분위기다. 오프모임을 가급적 자제하는 ‘내밀한’ 호러영화 커뮤니티 호러타임즈는 불사의 뱀파이어는 아니더라도 조용하고 오랜 밀월을 꿈꾼다.
호러 마니아들의 최근 공포영화에 관한 취중진담
<하우스 오브 왁스> 괜찮았어?
상영회의 뒤풀이. 소주잔이 오가는 가운데 최근작 <하우스 오브 왁스>에 대한 감상을 누군가 슬그머니 끄집어냈다. 그러자 조엘 실버와 로버트 저메키스가 설립한 공포영화 전문제작사인 다크 캐슬에 대한 애증이 섞인 말들이 잔들과 함께 오가기 시작한다. “오프닝은 역시 다크 캐슬”이라는 호평, “오프닝 빼면 완전 황”이라는 악평이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린다. 다행히 <헌티드 힐>에 대한 칭찬은 공통분모. 지난해 한국 공포영화 중에는 <알포인트>에 관한 논의가 단연 우세. “반전에 의존하지 않고, 장르로서의 공포영화를 정공법으로 밀어붙인다”거나 “소재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새로운 면을 개발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한 회원은 “좋은 의미의 관습적 공포영화는 <알포인트>, 반대로 실망스러웠던 관습적 공포영화는 <분신사바>”라고 지적했다. <시실리 2km>를 거론하며 “이음새는 그다지 매끄럽지 않지만 호러영화의 가장 큰 미덕인 새로움이나 전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후한 평가도 있었다. 지난해 공포영화들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이제는 클리셰로 전락한 진부한 반전만을 노리다가 자멸한 사례들이 대다수”라며 “장르 문법에 충실하면서 드라마의 기본기를 잘 지키는 작품”이 오히려 관객의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