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에 입이 딱 벌어지는 인도영화도,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끔찍한 사지절단 호러영화도, 코흘리개들의 전유물이라고 치부되기 일쑤인 만화영화도 일단 한번 매력을 느낀 이들에겐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활력소이고 해방구가 된다. 극장에서 개봉영화를 관람하고,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다운받고, DVD로 희귀영화를 소장하는 것으로는 2% 부족함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들이 한 군데 모였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과 호흡하기 위해 함께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영화 속 춤과 노래를 따라하고, 주인공들의 겉모습까지 재현하는 사람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영화를 통해 삶을 바꾼 이들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무언가를 진심으로 즐기는 이들에게 일상의 지루함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인도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호러타임즈, 애니세대 코스프레팀의, 조금은 낯설고 특이해 보이는 영화 향유법을 소개한다.
영화는 춤추고, 관객은 따라하고∼
춤추며 영화 보는 ‘인도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지난 6월12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모처에 자리한 ‘인도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하 인영사모) 사무실. ‘인도영화 속 춤 강좌’가 한창인 이곳은, 춤과 노래가 빠지지 않는 발리우드영화(뭄바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 뭄바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대중영화를 일컫는 명칭) 속 한 장면을 방불케 한다. 인도의 전통 춤도 아니고, 요즘 한창 다이어트계를 강타하고 있는 요가와도 전혀 관련이 없는 이 요상한 강좌의 목적은 단 하나, 발리우드영화에서 주인공들의 희로애락을 대변하는 춤을 제대로 한번 따라해보자는 것. 초기에는 무려 5kg의 체중감량을 보장하면서 최고의 다이어트로 급부상했으나, 강습생들간의 급격한 친목도모로 인해 뒤풀이가 잦아지면서 다이어트 효과는 보장할 수 없게 된 이 강좌가 시작된 것은 2003년의 일. “허리도 제대로 구부러지지 않아서 낑낑대는” 몸치였던 이들이, 이제는 웬만큼 유명한 발리우드의 영화음악이 흘러나오면 분홍신의 마법이라도 걸린 양 춤바람에 몸을 맡긴다.
인영사모라고 들어보셨나요?
그러나 인영사모 사무실의 본모습은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드러났다. 일주일에 3, 4회 정도 열리는 상영회를 위해 회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20개 남짓한 좌식의자가 모두 주인을 찾을 무렵. 왁자한 분위기가 무르익고, 10년 가까이 발리우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샤루칸 주연의 <메후나>(내가 여기 있잖아)가 시작되자 사무실 안은 엄청난 함성으로 뒤덮인다. 심심풀이 간식거리를 늘어놓고 앉아서 샤루칸이 멋진 포즈를 취하며 등장하면 너나할 것 없이 소리를 질러대고, 정의로운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당에겐 큰소리로 욕을 퍼붓는데, 정숙한 극장 매너에 익숙한 이들에겐 별천지가 따로 없다. 여기에 흥겨운 가무(歌舞)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힌디어 가사를 따라부르며 춤동작까지 일사천리로 재현하기 시작하면, 떠들썩하기로 소문난 인도의 영화관도 부럽지 않다.
사람이 많을 때는 최고 40, 50명까지 관객을 동원하는 정기상영회.
샤루칸이 멋진 대사를 읊을 때 상영관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
모름지기 목소리가 커야 영화 혹은 배우에 대한 애정을 과시할 수 있는 이곳에서 최고의 인도영화광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는, Daydreamer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동호회의 왕언니 김진숙(37)씨. 그는 2003년 부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인도영화를 접했다. 그해 4월1일 거짓말처럼 장국영을 떠나보내고 두문불출의 시기를 보내던 그가 1회 때부터 꾸준히 찾았던 부천영화제를 습관처럼 방문했고, 생전처음 맞닥뜨린 인도영화를 통해 “삶의 희망과 기쁨을 다시 찾은” 것. “그때 접한 영화가 샤루칸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딜세>(진심으로)였다. 혹자는 뮤직비디오 같은 춤과 노래가 생뚱맞다고 무시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엄격한 검열을 피하면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게 된 발리우드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영화에는 낙천적인 인도 사람들의 일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행복한 표정으로 인도영화의 매력을 설파하는 그의 얼굴에서 “장국영의 죽음 이후 다시는 회사도 나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어두운 과거는 흔적도 없다. 이후에도 인도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김진숙씨는 며칠 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인영사모의 문을 두드렸다.
인도영화의 낙천성과 활기가 좋다
회원들은 인영사모를 찾은 계기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인도 전문 여행사에서 일하다가 인도영화에 빠져들게 된 인영사모의 운영자 정광현(31)씨처럼 인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 이들은, 여행길에 들렀던 활기 넘치는 인도의 일반 영화관 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이곳을 찾는다. 나머지는 김진숙씨처럼 부천영화제나 여성영화제 등에서 인도영화를 접한 뒤 관심을 가지게 된 경우. 일단 한번 인도영화에 맛을 들인 회원들은 한달에 4, 5번꼴로 상영회에 참여한다. 40편의 영화를 기본메뉴 삼는 이 상영회는 본 영화를 보고 또 볼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인데, 주인공 샤루칸이 장국영과 비슷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깔호나호>(내일은 오지 않을지도 몰라)는 서른번 이상, 볼 때마다 관객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딜왈레 둘하니 레 자엥게>(용감한 자가 신부를 데려가리)는 열번 이상 관람한 김진숙씨처럼 통째로 대사를 외울 정도로 반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4년 8월 프린지페스티벌 당시 발리우드 춤 공연 장면.
발리우드영화에선 여자들의 손과 발을 헤나로 장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영사모 회원들 대부분이 과거, 엄청난 홍콩영화 팬들이었다는 사실. “한번 좋아하면 앞뒤 안 가리고 좋아한다는 점에서 인도영화 팬과 과거 홍콩영화 팬은 많이 비슷한 것 같다”는 것이 김진숙씨의 설명이다. 따라서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수준미달의 작품을 양산하기도 했던 과거 홍콩영화에 대한 편견이 고스란히 인도영화에 적용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하다. 인도영화는 <춤추는 무뚜>가 전부인 줄 아는 건 그래도 나은 경우(땅딸막하고 통통한 배우들이 등장하는 <춤추는 무뚜>는 남인도영화로, 늘씬한 호남호녀들이 잔뜩 나오는 발리우드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할리우드에 대적할 만한 영화대국을 몰라보고, “인도에서 영화도 만드냐”고 반문하는 것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인도에선 연간 1천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인도영화에 담긴 특유의 낙천성과 활기를 즐긴다는 인영사모 회원들의 인도사랑은 영화를 넘어선 지 오래. 춤 강좌를 비롯해서 영화 속 주인공의 손과 발을 장식하는 문신을 배우는 헤나 강좌가 계속해서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김진숙씨처럼 13년 동안 다녔던 회사를 정리하고 1, 2년 안에 인도에서의 장기체류를 꿈꾸는 회원들도 인영사모에선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인생관을 바꾸고, 다른 세계와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이들은 이제, 새로운 인생까지 스스럼없이 계획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화 한편이 인생을 바꾸는 기적은 도처에 존재한다(인영사모 홈페이지 www.indiamovie.co.kr, 문의 02-540-8151).
인도영화 폐인들의 4가지 증상
1.일반 영화를 보다가도 ‘왠지 지금쯤이면 춤과 노래가 나올 법한데’라고 생각한다 춤과 노래는 인도영화의 필수요소. 러닝타임이 3시간을 넘는 것도 영화 한편당 예닐곱번씩 가무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선 아직도 춤과 노래가 없으면 영화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
2.사람들 얘기가 힌디어로 들린다 <까삐 꾸씨 까삐 깜>(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고), <꾸츠꾸츠 호타 해>(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어), <딜 차타 해>(내 마음이 원해), <까호나 삐야르 해>(사랑한다고 말해줘)…. 직접적인 제목이 대부분인 인도영화 제목 100편만 알아도 웬만한 힌디어는 구사할 수 있다. 게다가 영화 한편을 수십번씩 보게 되면 직장에서 일하다가도 힌디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3.눈을 감으면 샤루칸이 보인다 발리우드의 3대 칸 중 한명인 샤루칸은, 인영사모 회원들 모두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절대지존이다. 처음 본 이들은 느끼하다거나, ‘오중이 삼촌이냐’라며 비웃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지라도 회원들 앞에선 절대 내색하지 말 것.
4.극장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인도영화는 모여서 떠들썩하게 감상하는 것이 제맛. 맘대로 추임새를 넣고, 내키는 대로 소리를 질러가며 영화를 보던 버릇이, 일반 극장에선 불편하기 이를 데 없다. 자칫 잘못하면 시끄럽게 드라마를 감상하는 동네아줌마 취급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