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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알을 깨고 나온다, 리처드 기어의 <사관과 신사>
홍성남(평론가) 2000-03-07

<피플>은 지난해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자로 리처드 기어를 꼽은 바 있지만, 대표적인 남성 섹스심벌로서 그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일 것이다.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1977), <아메리칸 지골로>(1979), <브레드레스>(1983)로 이어지는 일련의 출연작들에서 기어는 뭇여성들을 사랑의 포로로 만들 정도로 용출하는 성적 매력을 과시했던 것. 당시 건장한 체격을 무기로 곧잘 정면 누드를 보여줘 화제를 모았던 그는 일부로부터는 노출증 환자라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테일러 핵포드가 연출한 <사관과 신사>는 길들여지지 않은 ‘섹시 가이’ 기어의 이런 전성기적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다. ‘청춘 스타’ 존 트래볼타가 거절한 역을 물려받은 기어는 이 영화를 발판삼아 스타로의 본격적인 진입로로 껑충 뛰어오르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자에 호색가인 아버지 밑에서 불우하고 외로운 소년기를 보낸 잭 메이요.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어느 날 제트기를 타는 해군 조종사가 되고자 고향을 떠나 해군사관학교에 입소한다. 해군 장교가 되기 위해선 여기서 13주간에 걸친 힘든 훈련에 통과해야 한다. 한편 이 해군기지 근처에 사는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을 고된 육체노동과 가난으로부터 구원해줄 미래의 장교를 만나길 고대한다. 폴라 역시 자기 어머니에 이어 2대째 비행사의 아내를 꿈꾸는 여성들 가운데 하나. 연대 무도회장에서 만난 잭과 폴라는 서로에게 이끌리게 된다. 점차 진실한 마음으로 잭을 사랑하게 된 폴라. 반면 잭은 훈련이 끝나갈 때쯤 폴라와의 관계가 버겁다고 느낀다.

<사관과 신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반항적이고 외로운 패배자(loser) 잭이 자기를 가로막는 견고한 껍질을 깨고 뛰쳐나오는 이야기, 즉 그의 성장에 대한 영화다. 폴라와의 사랑이 그 계기를 마련해주는 한 가지 축이라면, 다른 중추적인 축은 13주 동안의 훈련이라는 난관이다. 그리고 아마도 후자쪽이 다소 진부한 러브 스토리(대개의 러브 스토리가 그렇지만)보다 더욱 흥미를 끄는 ‘메인 이벤트’(main event)라고 할 만한 것이다. 잭에게 13주의 훈련기간이란 자신의 도덕 교육을 위한 일종의 자기 고문이다. 체력면으로 보면 훌륭한 군인감으로 손색없지만 동료들에게 버클이나 군화를 밀매할 정도로 얄팍한 이기주의자가 바로 잭이었다. 그를 혹독하게 다루는 깐깐한 훈련 교관 폴리와의 애증관계 속에서 잭은 비로소 좀더 성숙해져간다. 자신의 개인 기록을 제쳐두고 동료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할 줄 아는 ‘사회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 것. <사관과 신사>는 잭이 이 같은 사관/신사로서 새출발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관과 신사>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한 버전이라고 볼 수 있는 영화다. 여기엔 잭의 상승 스토리 외에 두 여자의 상승과 하강의 스토리가 있다. 파일럿이란 지위 자체를 더 사랑한 폴라의 친구는 화를 자초하는 데 반해 진실한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한 폴라는 잭에게 안긴 채 사랑과 꿈을 모두 이룬다. 자, 이제 우리가 속한 저 높은 곳으로(<Up Where We Belong>: 아카데미상을 받은 영화의 유명한, 그래서 이젠 지겨워진 주제곡)….

뮤직, 큐!

감독 테일러 핵포드

80년대의 흥행감독 가운데 하나였던 테일러 핵포드(1944∼)는 당시에 무엇보다도 팝 음악에 대한 관심과 감각을 가졌던 감독으로 먼저 기억된다. <사관과 신사>의 <Up Where We Belong>뿐 아니라 <백야>(1985)의 <Say You, Say Me> 역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으며, <어게인스트>(1984)의 동명 주제곡 <Against All Odds> 역시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으니 말이다. 게다가 핵포드는 멕시코 출신의 로큰롤 스타 리치 발렌스의 짧은 생을 담은 영화 <라 밤바>(1987)의 제작을 맡아 로큰롤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USC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했던 핵포드가 전공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은 로스앤젤레스 TV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부터. 예전에 작업했던 TV 뉴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단편 <10대 아빠>(Teenage Father, 1978)로 오스카를 거머쥔 그는 그로부터 2년 뒤 장편 데뷔작을 내놓게 된다. 50년대 팝 음악 산업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 <아이돌메이커>(The Idolmaker, 1980)가 꽤 호평을 받았던 그의 첫 장편영화. 80년대에 핵포드는 <사관과 신사> 외에도 전직 풋볼 선수와 갱 두목의 애인의 사랑을 그린 <어게인스트>와 미국으로 망명한 구소련 출신 발레 댄서의 이야기를 담은 <백야>로 히트 행진을 이어나갔다. 그뒤 별다른 성공작을 내놓지 못한 그는 90년대 들어 <돌로레스 클레이본>(1994)과 <데블스 에드버킷>(1997)으로 체면을 유지했다. 최근 핵포드가 작업하고 있는 영화는 <삶의 증거>(Proof of Life). 러셀 크로, 멕 라이언이 출연할 액션·모험 영화로 올 크리스마스에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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