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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도전 아닌 값진 만남, <낭독의 발견>

유명인사들의 진솔한 삶의 향기 <낭독의 발견>

이병우의 출연 장면

묘한 보랏빛의 조명. 4줄의 필름과 영화 <연애의 목적>의 포스터, 복잡한 악보가 걸려 있는 신비로운 세트. 기타리스트 이병우가 그 한가운데 있는 의자에 앉아 기타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 썼던 칼럼의 한 소절을 낭독한다. “기타는 내가 좋아하는 세계로 가는 타임머신입니다. … 내가 기타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기타라는 악기를 대단하지 않게 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이병우가 ‘낭독의 즐거움’에 빠져드는 사이, 피아니스트 신이경의 반주가 곁들여진다. 지난 6월15일 있었던 <낭독의 발견> 녹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2003년 11월 첫 방송을 내보낸 뒤 마니아층을 확보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장수’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은 KBS1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방송하는 문화 블록 <TV 문화지대>의 수요일 코너다. 문인에서부터 성우, 배우, 가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책에서 되새겨볼 만한 부분을 소리내 읽고, 자신의 느낌을 전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서정적으로 읽어나가는 이들을 통해 잊혀졌던 시와 낭독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겠다는 것이 홍경수 PD가 말하는 기획의도.

녹화에 앞서 만난 홍 PD는 “2002년 4월 일본 여행길에서 좋은 글과 읽는 방법이 소개된 <소리내어 읽는 일본어>를 접하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시각이 중심이 되는 TV에서 ‘소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라는 주변의 우려에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확신이 있었다. 흥행은 하지 못하더라도 나쁜 프로그램은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라며 2년 전을 회상했다.

초 단위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느긋하게 시를 읽자는 것은 분명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의 시도는 예상외의 성공을 거뒀다. 브라운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문인들- 황석영, 도종환, 피천득, 천상병, 정현종 등- 을 볼 수 있었던 방송 초기에는 평균 시청률이 5%나 나오기도 했다. 5%는 수요일 밤 11시35분이라는 악조건에서 이룬 성과치고는 매우 만족할 만한 수준이다. 이에 대해 홍 PD는 “<낭독의 발견>이 사색적인 성찰을 하고 싶어하는 대중의 미묘한 욕구를 해결해주는 ‘그릇’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 같다”고 말했다. <낭독의 발견>이 2% 이상의 시청률을 기대할 수 없어 어느 장르보다 ‘조기 종영’이 잦은 태생적 ‘한계’를 지녔음에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시청률을 의식해 무리한 변형(토크쇼나 연예인의 신변잡기를 소개하는 등의)을 하지 않고 ‘낭독의 즐거움’을 알리는 초심을 잃지 않은 데 있다. 이는 프로그램 홈페이지에 시청자들이 올린 “삶으로 말하는 시, 삶으로 내뱉는 낭독. 백기완의 폭풍 같던 삶에 존경과 감격을 보냅니다”(윤성학), “시를 듣고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낭독의 발견>의 힘인가 싶습니다”(김주영) 등의 의견을 보면 알 수 있다.

<낭독의 발견>을 통해 좀처럼 보기 힘든 출연진들의 진솔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음도 프로그램 장수의 요인이다. 실제로 가수 김현철은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을,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를 막 끝낸 고두심과 노희경은 아직 드라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애틋함을, 시인 황지우는 시쓰기의 고충을 자연스레 내뱉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설가 마광수가 낭독하는 모습

홍 PD는 ‘예민함’으로 따지자면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낭독의 발견> 출연진들이 이토록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낭독의 발견>에서만 볼 수 있는 무대와 손색없는 배경음악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낭독의 발견>처럼 전문 아트디렉터가 있는 프로그램은 흔치 않다. 아트디렉터 윤이서씨는 <꽃보다 아름다워>의 고두심을 위해 허브 화분 수십여개와 나무 사다리, 긴 벤치를 이용해 초록빛 허브 정원을 만드는가 하면, 시인 백기완에게는 금속으로 된 대나무 십여 그루를 이용해 섬뜩하면서도 아름답고 비장미가 넘치는 무대를 선사하기도 했다. 강승원 음악감독과 신이경 피아니스트는 출연진과의 한달여에 달하는 인터뷰를 통해 그가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음악을 고른다. 이들이 방송이 낯선 은희경을 위해 그가 평소 즐긴다는 비틀스의 곡들을 연주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러니 <낭독의 발견> 무대를 찾은 출연진들이 “꿈에 그리던 고향에 온 것 같다”고 입을 모으는 것은 당연한 일. 홍 PD는 “이 점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게 하는 묘한 시너지 효과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대본과 세트 등은 매우 꼼꼼하게 준비하는 편이지만 카메라 워크 등에는 ‘애드리브’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소개한 일화는 지난 6월8일 있었던 백기완 편. 홍 PD는 “백기완 선생의 백발과 주름과 눈빛이 전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도저히 카메라를 멀리 뗄 수 없어 이례적으로 ‘빅 클로즈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가수 양희은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꺼내놓고 다시 그걸 바라보며 인생을 반추하던 모습이 아직도 아련하다. <봉우리>를 부르며 흘린 한줄기 눈물을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며 “시청자들이 잊혀져가는 ‘낭독의 즐거움’ 외에 출연자들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2년여라는 긴 시간을 들여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린 <낭독의 발견>은 지금 정보와 오락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홍 PD는 이를 위해 가수 인순이와 김건모, 이적 등이 출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가수 인순이에게는 여러 면이 있다. <열린 음악회>에 나가 열창하는 밝은 모습, 어렵게 살았던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미래에의 희망. 우리는 그가 가진 희망을 보여줄 예정”이라는 홍 PD의 강직한 설명에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오는 6월22일에는 소설가 마광수가 나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윤동주의 <별헤는 밤> 등을 낭독할 예정이다. 자신이 작곡한 <자장가>와 <연애의 목적>을 직접 연주하며 멋진 무대를 선보였던 기타리스트 이병우 편은 29일 전파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