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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고전주의의 물결 [2] - 사진·상품
남은주 2005-06-10

사진: 패러디를 넘어 창조의 순간으로

명화의 차용 - 김중만·<섬>·<친절한 금자씨> 포스터

ⓒ김중만

<친절한 금자씨> 포스터

물론 현대 이미지 중에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원작의 아우라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살모사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운 이미지는 없다. 뒤샹이 모나리자의 복제화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넣은 이래 표현을 위해 원작을 훼손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적어도 미술에서는 독창적일 것도 없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업 사진에서는 가치있는 원본이 예술성을 확보하고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패션 디자이너 이브생 로랑은 광고 사진에 벨라스케스, 프리다 칼로, 루벤스들의 미술 작품을 차용해 예술의 아우라를 불어넣기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클림트의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한 보석회사의 광고 사진과 달리의 초현실적인 공간을 그대로 옮겨온 한 의류회사의 광고 사진에서 보듯이 지금 부유층에 소구하고자 하는 광고주들이 가장 즐겨 택하는 방식이 명화를 차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

피에르 쥘스 커플의 작품.

그러나 최근 상업 사진가들은 더 나아가서 원본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는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패션 사진가로서 세계 5대 사진가 중 한명인 파올로 로베르시는 인상주의 화풍으로 방향을 잡았고, 그런 그의 작품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고의적으로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흔들리는 렌즈로 검은색으로 흐트러진 머리와 붉은색을 받아 빛나는 입술, 그리고 황금색 피부를 포착한다. 짙은 색의 수채화처럼 대조를 이루는 색감의 주인공들은 물론 여자들이다. 르누아르, 드가가 그렸던 바로 그 여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의 붓질을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이다. 우리나라의 상업 사진에도 이런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재해석해 만들어졌으며, 화제가 됐던 <친절한 금자씨>의 티저 포스터는 피에르 쥘스 커플의 사진 <마돈나>를 바탕으로 했다. 이 두 포스터를 디자인했던 김상만은 “고전적인 회화가 주는 여러 측면 중에서 인물 구성과 배치, 조명 같은 기술적 요소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원작품의 창의성에 힘입는 점이 많아 고전 작품을 바탕으로 영화 포스터를 제작한다”고 했다.

한국 패션 사진계의 대부라 할 만한 사진가 김중만은 <보그>를 비롯한 패션지에 신윤복의 <미인도>를 비롯한 동양화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사진을 실으면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발맞추어 적극적인 장르 혼용의 조짐도 보인다.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같은 이는 자신의 옷에 신윤복의 그림을 입히기도 했으며, 디자이너와 화가, 미술가와 사진가가 손잡고 적극적으로 명화 이미지를 차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외국에서는 파코라반이 달리 드레스를 만들어내듯 올 봄 패션쇼에서는 서상영, 최범석 같은 젊고 창의성 있는 디자이너들이 화가들과 손잡고 만든 옷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원작 훼손, 뜻밖에도 상업적인 영역에서 새로운 창조의 대목을 만났다.

사진작가 김중만

“나는 순수하고, 원래부터 순수했다”

김중만이 돌연 순수로 돌아가련다고 말했다. 가나아트화랑의 전시회를 열흘 앞두고 그는 온통 작가로서의 감수성에 지배당한 듯했다. 그의 이번 전시회의 테마는 꽃. 그에게서 사실적인 꽃을 기대했다면 물론 낭패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에게서 영감을 받은 그의 작품은 그린 듯 찍은 듯 그 경계조차 불분명해진 이미지 그 자체다. “오키프가 탐욕스러운 꽃을 그렸다면 저는 그 꽃에 선정성을 더합니다. 보는 사람을 도발하지만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을 만큼 정제되고 절제된 꽃이오.” 세계, 인물, 패션을 거쳐 한 대상에 집요해지기로 했다는 김중만은 대상의 미학적 표현을 위해서라면 소재나 기법을 가리지 않는 용감한 작가다. 그리고 그는 즐겨 미술적인 소재나 주제를 사진에 끌어들인다. “제가 봐도 점점 회화쪽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업은 즉흥적으로 하고, 인화할 때도 원래 필름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니까 찍을 때부터 회화적인 성향이 담긴 구도와 앵글을 추구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순수로 돌아가고 있나보다 합니다.”

상품: 이름만 남기고 다 바꿨다

신복고주의 제품들 - 프라이드·쁘와종·<리라이팅 시리즈>

퓨어 쁘아종

프라이드

마케팅에서 베스트셀러의 명성만큼 매력적인 게 있을까? 불황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소비자들은 확실한 제품의 질을 보증받고 싶어서 오랜 베스트셀러를 찾고, 기업들은 상표를 알리는 데 드는 광고비용을 아끼기 위해 이를 다시 내놓는다.

이러한 경향은 제품의 질이 특히나 중요시되는 자동차계에서 두드러진다. 기아자동차는 4월 추억의 자동차 ‘프라이드’를 재생산, 판매를 시작했다. 프라이드는 연비가 좋고, 내구성이 우수하며 잔고장이 적다는 등 소비자들의 경험과 평가에 의해 실용적인 차의 대명사가 되었다. 83년 생산된 차명을 그대로 사용한 스포티지, 줄곧 한 브랜드를 지켜나가는 쏘나타 등은 자동차 업계의 복고바람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런데 프라이드는 사실은 이전의 프라이드 자동차가 아니라 차체는 최근까지 생산됐던 리오의 후속 모델로 개발된 것이다. 외관만 보아도 동그란 램프와 볼륨감 있는 뒷모습, 리오보다도 더 넓은 실내 공간으로 이전의 프라이드 자동차와는 한참 다르다. 이 때문에 기존의 프라이드를 명작이라 부르며 아끼던 자동차 동호회들에는 벌써부터 비판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GM대우는 마티즈 신형을 출시하면서 ‘이름만 빼고 다 바꿨다’는 광고 카피를 내세웠다. (주)엔프라니 마케팅팀의 김왕기 팀장은 “이름은 그대로 두고, 품질은 신형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혁신하는 것이 요즘 자동차 업계의 추세”라면서 본래 제품 품질에 대한 믿음으로 소비자들을 유도했더라도 더 좋은 제품을 준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크리스찬 디올에서는 세계적으로 최고의 매상을 올렸다는 향수 ‘쁘와종’의 이름을 딴 시리즈를 새롭게 만들어 내놓았다. ‘이쁘노띡 쁘와종’, ‘땅뜨르 쁘와종’, ‘퓨어 쁘와종’이라는 향수들은 그러나 용기의 형태 말고는 기존 향수와 닮은 점이 없다. 기존의 쁘와종 향수가 오리엔탈이라면 이 향수들은 꽃향기거나 파우더향, 코튼 화이트라는 깨끗하고 밝은 느낌의 향기들이다. 쁘와종을 좋아하던 사람들의 추억을 자극하지만 향수의 유행에 맞게 밝고 가벼운 느낌의 제품들을 내놓는 것이다.

<리라이팅 시리즈>

복고주의 바람은 출판계에서도 강력하다. 신영복의 <나의 동양고전독법>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데 이어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120여종에 총판매 100권을 넘기게 되었다. 집집마다 장식용으로 있던 오래된 전집과 다른 점은 흐르는 듯한 번역과 현대적인 편집에 고전에 대한 편집자와 작가의 독보적인 해석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살림출판사는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를 내며 <리바이어던> <사기> <군주론>들에 이 책의 배경과 작가의 생애 등 원문과 책 이야기를 적절히 곁들여, 읽는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가장 고무적인 일은 고전을 다시 쓰는 사례다. 그린비 출판사의 <리라이팅 시리즈>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제목으로,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으로 다시 쓰여졌다. 소장학자들과 출판계의 노력 속에 고전은 우리를 웃기고 울리는 솜씨를 발휘한다. 그리고 고전을 다시 붙들어 쓰고 읽는 우리의 문화에는 아직 희망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