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선스로 ‘지각발매’되는 음반들이 있다. 이른바 IMF 사태 이후, 메이저 직배사조차 라이선스로 발매하는 대신 음반을 수입해서 유통하는 ‘안전한’ 전략을 선호해온 까닭이다. 그래서 ‘소량의 수입 판매 → 국내외의 호평 → 뒤늦은 라이선스 발매’의 경로를 거치는 음반이 적지 않게 나왔다. 캐나다 여성 싱어송라이터 파이스트의 <Let It Die>(유니버설 발매)도 그런 경우다.
파이스트(본명은 레슬리 파이스트)의 첫 공연 경력이 ‘펑크의 전설’ 라몬스(Ramones)의 오프닝 무대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무명 시절을 상징적으로 요약해준다. 현재 파이스트의 음악성향으로는 짐작조차 어려운 후일담이지만, 그녀는 펑크 로커로 출발해 이를 5년간 지속했다. 그러던 중 성대 이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의사의 ‘음악적 사형선고’를 듣게 된다.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이 되어 그녀를 새로운 음악세계로 이끈다. 기타리스트, 세션 보컬, 솔로 싱어송라이터의 길 말이다. 이를 갈무리한 것이 2집이자 메이저 데뷔작인 <Let It Die>다.
음반을 시작하는 <Gatekeeper>와 <Mushaboom>은 파이스트가 인디 싱어송라이터와 보컬 재즈의 장점을 명민하게 결합할 줄 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기에 재지한 프렌치 팝 <Tout Doucement>까지 속성으로 들어보면,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보컬 재즈계의 젊은 피’ 넬리 매케이를 연상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파이스트는 재즈에 연연하지 않으며 더 넓고 여유롭게 여러 스타일을 섭렵한다. 사디(Sade)를 떠올리게 하는 <One Evening>과 <Leisure Suite>는 이국적 분위기와 그루브 속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하고, <Lonely Lonely>와 <When I Was a Young Girl>은 주술적 스토리텔링을 상이한 질감으로 빚는다. 담백하고 훵키한 편곡으로 놀라움을 안기는 <Inside and Out>(비지스), 댄서블하게 재창조한 <Secret Heart>(론 섹스미스) 같은 커버곡들은 단지 이채로운 순간에 머물지 않고 음반의 매력을 배가한다. ‘PJ 하비, 조니 미첼, 수잔 베가, 아스트루드 질베르토, 니나 사이먼의 결합’이란 평은 불가피하지만 상투적이다. 하지만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관능적이면서도 해맑은 이 음반의 매력은 전혀 상투적이지 않다. 귀보다 가슴이, 머리보다 몸이 먼저 감응하게 하는 흔치 않은 음반이다. 2005년, 오프라인 음반점이나 온라인 음악 사이트에서 주저없이 선택할 만한 라이선스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