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석 박사의 발표로 논란에 빠진 것은 미국만이 아니다. 독일의 슈뢰더 총리도 분위기에 맞춰 발빠르게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과 독일은 물론이고, 나름대로 세계를 이끈다고 자부하는 나라의 정부들은 각자 자국 연구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주느라 바쁜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에는 배아복제연구의 찬반론이 실렸다. 독일의 저명한 줄기세포연구자 위르겐 헤셸러. 그는 황 박사가 이 분야에 “이정표”를 놓았다고 높이 평가하면서, 연구 제한만 없었다면 지금쯤 자기들이 연구를 주도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독일 정부를 원망했다. 다분히 시샘과 부러움이 뒤섞인 반응이다.
물론 이 연구에 원칙적 반대를 표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가령 독일 연구자협회장 루드비히 비나커는 황 박사의 연구는 “과학도 아니고, 치료와도 무관하며, 그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첫 번째가 되려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이 연구의 치료효과에도 회의적 반응을 보여, 이 연구가 치료에 적용될 경우 “간에서 머리카락이 자라고, 뇌에서 모유가 분비되는”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결정적인 것은 시민들의 견해다. 인터넷 폴을 통해 독일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더니, 응답자의 약 43%가 연구를 허용해야 한다고 답했다. 나머지 25%는 종교적, 생태적 이유에서 원칙적 반대를 표명했다. 나머지 32%는 이 연구가 실제 치료로 이어질지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들 유보층 역시 줄기세포 연구의 치료효과만 확실하다면, 언제라도 찬성으로 입장을 바꿀 태세다.
한마디로 줄기세포 연구의 실용성만 입증된다면, 배아복제에 따르는 윤리문제는 접어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게 대부분의 견해인 모양이다. 사람들이 태도를 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배아복제의 윤리성보다는 그것을 이용한 치료의 가능성이라는 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는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애초에 윤리의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황우석 문제는 윤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인공배아’를 개발해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듣자 하니 소의 난자에 인간의 유전자를 집어넣은 것이라 한다. 황소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미노타우루스. 이 신화적 모티브가 오늘날 생명공학적 버전으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화적 상상력은 테크놀로지에 힘입어 현실이 되고 있다.
배아복제 기술을 오직 치료목적으로만 사용한다고 말하나, 사실 그것이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미친 과학자가 어디 공상과학영화 속에만 있겠는가? 생명공학의 쾌거 속에서도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는 불안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이 괴물을 두려워한 고대인들은 그를 다이달루스가 만든 미로 속에 가둬버렸다. 반신반수에 대한 신화적 공포감은 오늘날 생명공학 앞에서 느끼는 기술적 공포감으로 전환했다.
우리의 줄기세포 연구는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생명윤리에 관한 논의는 시작도 안 됐다. 그 논의 자체가 고도로 전문화한 지식을 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정도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이 사회에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의학의 쾌거에 대한 찬양일색의 분위기 속에서 윤리문제를 제기했다가는 ‘분위기 썰렁죄’에 더해, 대중에 의해 ‘국가반역죄’로 몰릴 위험마저 있다.
과학의 압도적 우위 속에서 앞으로 윤리적 문제설정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하지만 기술과 윤리, 어차피 미래에는 함께 갈 수밖에 없다. 첨단 기술일수록 그에 걸맞은 첨단의 생명윤리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의 생명공학 기술이 세계를 앞서 간다면, 이것을 또한 우리의 생명윤리를 세계적 수준에 올려놓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