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1일, 저녁 6시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잡혀 있는 보스니아 사라예보 출신의 뮤지션 고란 브레고비치는 생각보다 우리나라에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 우리는 대개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의 영화를 통해 그의 음악을 접했다. 특히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에서, 그의 음악은 처음에는 너무나 먼 땅의 소리라 익명으로 다가왔지만 사무치는 멜로디와 리듬으로 단번에 듣는 이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풀이의 음악이자 슬픔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인생의 축제를 찬미하는 놀이의 음악이었다. 풀이와 놀이. 눈물 자국이 마르지도 않은 채 슬픈 사람들이 춤을 춘다. 우리는 그 음악이 어떤 장르들의 복합적인 구조물인지 알기도 전에 무슨 기능을 하는 음악인지는 듣는 순간 알아차렸다. 우리도 그런 음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집시의 시간>에 채집된 집시 음악을 들으면 음악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슬픔을 이겨내는 체계화된 울부짖음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울고 싶을 때 시원하게 울거나 답답할 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속에서 뭔가가 풀리는 것처럼, 집시 음악은 그것이 아니면 도저히 풀리지 않을 응어리를 특별한 진동으로 풀어주는 일종의 풀이다. 풀 것들이 많은 땅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유대인들도 그러하며 노예 상태에서 블루스로 마음을 달래는 흑인들도 그렇다. 고란 브레고비치가 살고 있는 발칸 반도 역시 풀 것이 많은 땅이다. 10년이 갓 지난 최근세사의 발칸은 인종청소가 자행되는 잔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우리가 예전에 유고슬라비아로 알고 있던 나라는 공중분해됐고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생소한 이름의 신생국들이 새로운 국경선을 긋고 살림을 꾸리고 있다.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응어리는 종종 브레고비치의 것처럼 맺힌 음악으로 응고된다. 그러나 고란의 음악이 완전히 생소한 발칸 땅의 민속음악이었다면 우리가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란 브레고비치는 60년대 이후 록이라는 국제적인 음악 언어를 바탕으로 음악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1500만장의 앨범을 판 경이적인 밴드 비엘로 두그메의 핵심 인물이기도 한 그는 그 이전에도 수많은 록 밴드를 전전했었다. 록의 어법은 그의 음악에 보편적인 이해가능성을 부여한다.
발칸 반도 땅에 드나드는 수많은 뜨내기들, 집시, 아랍 사람, 슬라브 사람, 그들이 마주치고 미워하고 사랑하는 사이에 복합문화적인 소리들이 발생한다. 이번 내한공연에서 고란 브레고비치가 그 소리의 정체를 벗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팬들,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