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뒤에 나는 세번이나 신문사로부터 졸시를 퇴짜맞았다. 한편은 ‘과도정권’의 사이비 혁명행정을 야유한 것이고, 한편은 민주당과 혁신당을 야유한 것이고, 나머지 한편은 청탁을 받아가지고 쓴 동시인데, 이것은 이승만이를 다시 잡아오라는 내용이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온당하지 않다는 이유에서 통과가 안 됐다. 그런데 이 동시를 각하한 H신문사는 사시로서 이기붕이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이는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규가 있다는 말을 그뒤 어느 글쓰는 선배한테 듣고 알았다.”(김수영, ‘치유될 기세도 없이’)
어린 후배가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무어냐 묻는다. 일 때문에 조각내어 본 책을 빼고 나니 지난 일년 동안 새로 읽은 책이 한권도 없다. 독서량이 한 사람의 지적 역동성을 결정하는 건 아니라 해도 그런 박한 독서량과 지식인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다니며 이러저러 이름을 팔아먹는 내 근황은 영 아귀가 안 맞는다. 같은 업종에 있는 이들만큼은 못 되더라도 한국인 평균은 따라가야지 싶다. 한국인이 책을 얼마나 읽는진 모르겠지만.
나도 책을 읽긴 한다. <마가복음> 얘기는 여러 번 했고 <김지하 전집>과 <김수영 산문집>은 내가 15년째 가까이 두는 책들이다. 늘 조금씩 들춰보는 이 책들은 내게 늘 새롭게 다가와 내 현재를 투영하고 반추한다. 변명삼아 말하자면 내가 새로운 책에 게으른 건 이 책들이 내 새로운 책의 필요를 면해주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내가 가진 <김지하 전집>은 70년대 중반 일본에서 나온 책이다. 한국에선 사용하지 않는 활자를 사용한 작은 책 속엔 김지하가 생명 사상을 말하기 전까지의 모든 글들이 알뜰하게 들어 있다. 지하를 읽을 때 특히 ‘양심선언’이나 ‘고행-1974’ 같은 글을 읽을 때 나는 뜨겁다. 책 속에 든 지하는 따라잡을 수 없이 장엄하고 치열해서 나는 늘 주눅든다. 나는 오늘 율려라는 신상품을 내놓고 식어가는 지하와 책 속에 든 뜨거운 지하를 분리하는 일로 열패감을 위무한다.
내가 가장 자주 들춰보는 책은 <김수영 산문집>(정확하게, <김수영전집-2 산문>)이다. 초보 좌파로 자기 규정하는 내가 마르크스주의 원전이나 신자유주의 비판서 따위를 끼고 살지 않고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을 끼고 사는 일은 썩 어울려 보이진 않지만 수영을 읽을 때 나는 늘 평화롭다.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뜨거움의 총량이 지하를 넘어서면서도 그 뜨거움의 방식이 나 같은 치졸한 인간에게도 적용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의 뜨거움이 한 인간이 특별한 상황 속에서 한껏 고양된 뜨거움이라면 수영의 뜨거움은 한 인간이 일생에 걸쳐 성격처럼 지닐 수 있는 일상적 뜨거움이다.
지식인의 인생이 본디 코미디인 이유는 ‘자기가 지향하는 바’와 ‘실제 자기’와의 숙명적인 거리 때문일 게다. 수영은 바로 그 숙명적인 거리를 최대한 좁혀보인 사람이다. 그는 대개의 우리처럼 소심하고 겁많고 이기적이지만 그런 소심함과 겁많음과 이기심을 숨기거나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와 맞섬으로써 자신과 세계와의 긴장을 누구보다 촘촘히 만든다. 내게 수영을 읽는 일은 수영을 부르는 일과 같다. 수영은 늘 내 곁에 와 그 큰 눈망울을 굴리며 미소짓는다. 그 미소는 늘 같아 보이지만 때로는 어, 너 잘했어 때로는 어, 이 나쁜 자식으로 내게 해석된다.
읽은 책이 없는 걸. 맥빠진 답변에 어린 후배가 되묻는다. 그럼 권하고 싶은 책이라도. 어, <김수영 산문집>. 왜요. 어, 김수영을 읽는 일은 한국에서 지식인이 되는 통과제의니까. 그래요. 어, 온갖 책을 다 읽어도 수영을 읽지 않았다면 지식인으로 결격이란다. 너에게 수영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