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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8일 개막하는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최민
사진 이혜정김혜리 2000-03-28

“전주, 소비를 넘어 생산하는 축제로”

영화는 한아름에 끌어안기에는 언제나 넘치고, 한곳에 머무르기에는 너무 숨가쁘게 약동하는 무엇이다. 그 영화가 올 봄에는 부산, 부천에 이어 ‘온고을’ 전주에 또 하나의 축제 마당을 열고 우리를 청한다. 달포 앞으로 다가온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과연 어디쯤 서서 관객에게 어떤 첫 만남을 제안하고 있을까. 상영작 및 초청 인사 발표 기자회견을 하루 앞둔 3월21일 아침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원장실을 찾아 최민(56) 조직위원장으로부터 대안 영화제를 표방한 전주국제영화제의 자화상과 약속, 근심과 희망에 대해 들어보았다.

-부산과 부천에 이어 세 번째 국제적 영화제를 탄생시키면서 출발점에 관한 고민이 컸을 것 같다.

=전주영화제의 타당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많았다. 큰 비용 들여 기존의 국제영화제들과 서로 잡아먹는 결과를 빚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열광적인 젊은 관객층이 있다. 영화 전문 주간지가 5년 넘게 건재한다는 사실도 그들의 존재에 대한 방증이다.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현지 문화계 인사로부터 이탈리아는 좋은 영화학교를 만들 잠재력이 충분한데도 우수한 젊은 인력이 컴퓨터와 방송 분야만 지망해 그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방송과 컴퓨터, 영화 관련사업에 한꺼번에 양질의 인력이 몰리고 있다. 여러 사립대 입시에서 영화학과가 최고 경쟁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영상원 작년 경쟁률도 25대1이었다. 이처럼 폭넓은 영화적 체험에 대한 욕구에 가득 찬, 준비된 관객이 또 하나의 영화제를 가능하게 한다.

- 영화제의 정체성을 빚어가는 데는 전주시의 지역성도 큰 몫을 차지할 텐데.

부산영화제는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 영화산업을 프로모션하는 데 역점을 둔 최대 행사다. 부천영화제는,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도시인 만큼 문화적 엔터테인먼트가 긴요한 부천시의 특성에 맞게 영화가 지닌 환상, 휴식의 측면을 적절히 부각시켰다. 전주는 판소리나 서예 같은 전통문화부터 음식문화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백그라운드가 탄탄한 도시다. 몇해 전 전주가 영상산업도시로 지정되고 인프라 구축을 위한 예산이 배정되면서, 영화 인력을 기르고 지역 주민에게 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줄 필요성이 제기됐다. 한편 전주는 6·25 직후 파탄난 서울의 영화산업이 채 수습되지 못하던 50년대에 <피아골> <아리랑> 같은 영화를 생산해낸 한국영화사의 잃어버린 고리이기도 하다. 전주를 영화의 중심지로 부활시키고 보수적인 도시 이미지를 변화시켜보자는 전주 시민과 문화계 언론계 인사들의 의지는 전주영화제의 큰 추진력이 됐다. 여타 영화제와 달리 지역사회의 발의에 의해 태어난 영화제이며, ‘예향 전주’에 대한 시민들의 자긍심도 대단하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부산은 ‘스타성’ 강한 영화, 부천은 재미있는 영화라면 전주는 대안 영화다” 라는 구도를 제시한 바 있다.

영화제가 본디 영화시장의 흐름을 규정하는 유행, 마케팅 전략의 맥락을 떠나 존재하는 장(場) 아닌가. 주류 영화, 할리우드와 그 아류 영화와 다른 영화들이 프로그램을 채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주제와 영화언어를 지녔다고 꼭 난해하라는 법은 없다. 실험 영화제가 아니므로 전위적인 영화 일색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독립영화의 개념이 따라 대안이라는 개념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유동한다. 이번 영화제에서 디지털 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현재 디지털이 영화 환경 변화의 키워드이기 때문이다.

-영상원 교수진, 영화광 문화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해온 비평가 등이 영화제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어 마니아 영화제, 학구적인 영화제라는 인상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도 있지만 전주영화제는 1차적으로 시민을 위한 영화제다. 애니메이션 섹션을 가족 관객을 위한 ‘상상의 집’과 마니아를 위한 ‘상상의 미로’로 이원화한 것도 일례다. 조직위원회쪽에서도 프로그래머 의존도가 너무 크지 않은가, 대안성에 치중해 대중성을 잃지 않을까 염려가 있었지만, 어느 영화제이건 관객 참여를 끌어내야 성공한다는 점을 프로그래머들이 알아서 배려하고 있는 터라, 개성을 밀어붙이는 편이 결과적으로 바람직하리라 판단했다. 그리고 어떤 작품이 일반 관객의 호응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예컨대 타란티노 영화가 구사하는 언어와 구조가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도 관객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또는 유머를 즐겁게 수용했다. 미지의 재미를 발견한 셈이고, 칸이라는 영화제가 그 ‘발견’에 큰 역할을 한 사례다. 학교인 영상원이 영화제를 주도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영상원 강사나 주변 인력이 워크숍 등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영상원과 전주영화제 사이에 직접적 관련은 없다.

-‘대안’이란 활짝 열린 개념이지만, 각종 국제영화제를 통해 퀴어영화, 정치적인 영화니, 선댄스식의 형식실험 등 대안에도 일정한 패턴이 형성돼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부산영화제와 차별성을 살리면서 국제영화제 수상작이 아닌 수작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까.

알다시피 국제영화제 수상작 선정에는 정치적 변수도 크게 작용하고 근소한 차이로 상을 받지 못하는 영화도 많다. 다양한 비전과 영화언어를 제시해 영화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주류 영화가 길러낸 영화에 대한 편견을 깨는, 그러면서도 한국 관객에게 맞는 작품들을 찾아내려 했다. 그런 영화가 부족하다고 프로그래머들이 어려움을 토로한 일은 없었다.

-당초 ‘섹션 2000’에 속해 있던 디지털영화 경쟁부문 <N-비전>을 메인 프로그램 안으로 아예 이동시켜 영화제 복판에 세웠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현장에서 가진 국제자문단 회의에서 디지털영화 섹션은 승산있는 아이디어라는 평을 들었다. 디지털은 중장비와 거대한 시스템을 두드려야만 영화제작에 접근할 수 있다는 통념을 혁신하고 있다. 우리도 각국 디지털영화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생산에 직접적 자극을 주고 퍼블릭 액세스 개념의 통로를 열자는 생각으로 ‘디지털 삼인삼색’을 기획하고 워크숍을 열었다. 워크숍에 대한 호응은 기대 이상이어서 울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온 남녀노소가 참여했다. 영화제의 본령은 물론 보고 즐기는 것이지만 전주영화제는 소비를 뛰어넘어 생산하고 교육하는 영화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디지털 삼인삼색’의 <N-1> 제작 과정에 영상원이 기자재와 장소를 제공하고 학생들을 스탭으로 참여시켰다. 영화제를 교육과 본격적으로 연계할 계획인지.

학생들을 배움과 실험에 참여시킨다는 뜻이었다. 영상원은 국립학교이므로 기자재 외부 렌탈이 까다롭고 대여료를 받는다 해도 처리하기 곤란하다. 전주영화제가 목표로 삼는 교육은 두 차원이다. 하나는 관객의 취향을 가꾸는 관객 교육이고 두 번째가 영화제에서 직접 일하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이다. 지금은 서울 프로그래머들이 전주영화제를 만들고 있지만, 미래에는 전주 출신의 프로그래머들이 전주영화제를 이끌 수 있게 될 것이다.

-총 예산 18억2500만원의 구성 내역과 현재 얼마나 확보됐나.

전주시에서 9억을 후원하고, 나머지는 기업체 협찬을 통해 충당한다. 후원회 조직도 결성됐다. 입장료 수입은 1억원 가량 예상하고 있다.

-부산과 부천의 경험을 토대로 시설과 운영 체제를 가다듬었을 텐데.

추석 극장 일정에 따라 매년 날짜가 변경되는 점이 부산영화제의 핸디캡이다. 전주영화제는 4월28일에서 5월4일로 가급적 고정하고 어린이날 특별 시사도 가지기로 했다. 예매와 자막 시스템은 앞서 열린 영화제를 참조했고 333명의 자원봉사자가 훈련받고 있다. 최고 시설은 아니지만 디지털 프로젝터 상영관이 될 덕진 예술회관은 음향시설을 개비중이며 다른 극장도 시설을 정비하고 있다. 영화제 극장이 밀집된 고사동을 영화의 거리로 만들고 차량 통행도 막아 재미난 공간으로 꾸밀 것이다. 상영사고 방지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 해외영화제와 특별한 연대는 없으나 로카르노, 로테르담 같은 중소규모 영화제를 주목하고 있다.

-영화학교 만들기와 영화축제 만들기의 차이가 있다면.

1년 가까이 터를 닦고 6개월 집중적으로 준비해 단기간에 결과를 보는 행사라는 점이 큰 차이다. 영화제는 록페스티벌이나 다른 축제와 달리, 조용히 영화를 감상하고 감독과 대화하는 일이 본체를 이루는 고요한 축제다. 잔치라면 모름지기 난장판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관습이라 부대행사를 극소화한 전주영화제에서 흥겨움이 덜하다고 느껴질까봐 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영화제의 낙이란 무엇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영화에 대해 떠들며 맥주 한잔하는 시간이 아니겠는가.

-조직위원장 활동의 무게중심을 어디 두고 있는지.

넓게 보자면 지역사회 특수성과 영화제의 정체성, 두 가지 논리를 효율적으로 결합하는 일이 최대 과제일 것이다. 애초에는 실무팀과 전주시 사이에서 조정 역할이 제일 힘들 것이라 예상했는데, 전주시가 프로그램 운영을 조직위원회에 일임하고 전적으로 지원에 힘쓰고 있어서 다행히 어려움은 적다. 그보다 첫회 행사라 60명이 넘는 많은 인원이 일을 하다보니 부서간 업무조정과 집약이 가장 큰 일이다. 집행위와 조직위를 일원화하는 등 워낙 조직을 간편하게 구성했기에 큰 문제는 없다. 조직의 효율제고, 경량화는 앞으로도 전주영화제의 기본 원칙이다.

-상을 차리고 잔치를 여는 입장에서 관객에게 초청장을 띄운다면.

전주영화제는 대안 영화제지만 까다롭고 파격적인 영화만 트는 곳은 아니다. 기본적인 대중성도 갖추고 있다. 부산, 부천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 최근의 왕가위 열풍, 일본영화 붐 등의 유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영화들을 찾아 즐겨주길 바란다. 자신의 취향을 단정하지 말고 영화적 모험을 맛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인터뷰를 마친 최민 위원장은 영화제 후원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행 정오 열차가 기다리는 서울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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