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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 찬반논쟁 [2] - 이종도 기자의 지지론
이종도 2005-05-31

한계까지 밀어붙인 냉정하고도 뜨거운 응시

※ 이 기사는 <남극일기>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홀바인의 <대사들>을 보면 그림 아래 부분, 어떻게 봐야 할지 답이 나오지 않는 구석이 마음을 찜찜하게 한다. 류트와 책, 지구본이 놓여 있는 아래쪽 탁자 밑에 사선으로 치우쳐 있는 것인데 그것은 이지러진 그림자 같기도 하고, 창으로 들어온 햇빛의 왜곡 같기도 하다. 그것은 옆으로 자세히 보면 해골임이 드러나는데, 그림 속 해골은 마치 보는 사람을 놀리기라도 하듯, 그림 정면에서 관람객을 바라보는 두 대사의 시선을 압도한다. 죽음의 시선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남극일기>는 매우 단순하고 작은 미니멀리즘적 드라마이다. 줄거리는 여섯명의 탐험대원이 남극의 남위 80도 지점인 도달불가능점을 향해 떠난다는 것이다. 그 조건은 여섯달은 낮만 계속되는 여름 동안에 그곳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만 계속되는 겨울이 오면 무보급 횡단 여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남극일기>엔 해석되지 않는 우수리, 텍스트 사이에 숨어서 좀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잉여 같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영화 속 탐험대원뿐 아니라 관객인 우리까지도 숨어 지켜보는 제3의 시선이 아닐까. 그것은 탐험대원과 관객을 바라보는 죽음일 수도, 탐험대원과 관객의 실패를 이미 알고 있는 남극의 시선일 수도 있다. 그 눈동자는 아주 잠깐 스쳐가듯 나올 뿐이어서 그 시선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건 대사들 속 해골처럼 찜찜함을 남긴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을 균질적으로 만족시키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기엔 드라마 규모가 작고, 서브 플롯이랄 게 없을 정도로 드라마는 단선적이며, 영화는 도달불가능점을 향해 거의 플래시백도 없이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의 순환도 없이 목표점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리고 있다. 오직 여섯명이 탐험 도중 서로에게 부대끼게 되는 갈등만이 영화를 움직이는 힘이다. 그런데 이 작은 이야기는 굉장히 강력하며, 그 안에 또 다른 굉장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이것은 빙하와 빙하 사이의 균열을 눈이 덮고 있는 크레바스, 즉 육지로 보이지만 공허를 숨기고 있는 구멍인 크레바스를 관객이 직접 채워가는 관객의 이야기이다.

당신이 보러온 영화가 <남극일기>가 맞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남극일기> 입장권을 끊는 순간 우리는 이면계약과 동의해야 한다는 말이다. 탐험대원과 함께 남극의 도달불가능점으로 떠날 의향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거기에 동의를 하지 않고, 홍보문구인 ‘남극이 우리를 미치게 만들었다’에 혹해 스릴러나 남극을 정복하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로 굳이 보겠다고 했을 때 영화는 그저 지루한 스릴러, 장르의 관습을 존중하지 않는 성긴 드라마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의 책임이 아니다. 영화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보는 사람이 굳이 자기가 원하는 장르와 장르의 관습만을 보겠다며 또 다른 <샤이닝>이나 <괴물>을 보겠다고 작정했다면 벌써 여기서 소통은 끝이다. 그렇다면 영화관에 오지 말고 <샤이닝>이나 <괴물>을 다시 보면 된다. 이 영화의 개성과 힘은 장르의 좁은 테두리와 장르의 협소한 관습을 넘어서는 데 있고, 그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크레바스,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허망하게 도달하려는 도달불가능점까지 미치고 있다.

이 영화,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아무것도 없다고 불평했다면, 벌써 대단한 걸 가져가고도 그걸 모르는 농담 속의 폴란드인과 같다. 돈 많이 버는 유대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던 폴란드인이 기차 안에서 유대인을 만났다. 그는 유대인에게 돈 버는 기술을 알려달라고 한다. 유대인은 돈을 몇 푼 주면 알려주겠다며 터무니없는 주술 거는 법을 말해준다. 폴란드인은 화가 나서 따지고, 유대인은 진짜 그 비술을 알려주겠다며 돈을 몇푼 더 받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돈을 버는 지혜가 벌써 전수되고 있음을 폴란드인은 알지 못한다. 왜 살인자도 숨어 있지 않고, 광인이나 괴물이 탐험대를 덮치지도 않고, 그간 남극을 다루어온 서구예술의 관습도 따르지 않느냐며 관객은 불만에 차서 영화에 따질 수 있다. 영화는 탐험대원을 하나씩 낙오시키며 이 영화의 흥미진진하고 자극적인 스릴러는 뒤에 있다며 점점 영화 후반부로 이끈다. 그 과정은 계속 반복, 심화(심화에 방점!)된다….

아니, 지금 말장난하는 거요? 그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데 이 영화가 좋다고 하는 건가? 아니죠. 말장난이 아니죠. 이 영화는 매우 뛰어난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다시 그 농담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요. 왜냐하면 이 영화 홍보문구의 전제가 틀렸기 때문이죠. 남극이 우릴 미치게 만들었다고 하지 말고, 삶이 우리 모두를 미치게 만든다고 했어야죠.

그렇다면 왜 남극인가.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 바이러스조차 살 수 없는 궁극적인 무이고, 해골처럼 우리를 바라볼 뿐인 실재이다. 영화는 순수한 욕망의 형식을 실험하기 위해 남극을 택한다(고 여겨진다). 그곳엔 무가 있다. 우리는 남극 안에 부는 블리자드라는 흰 폭풍 뒤에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목적지, 다가서려 하면 그만큼 더 뒤로 물러서는 욕망의 목적지가 있음을 안다. 왜 남극의 불가능도달점에 가려 하느냐고? 그럼 왜 당신은 최도형 대장처럼 위도 1도씩 넘어서며 더 많은 돈과 명예와 행복과 부, 그러니까 도달불가능점을 향해 가는가. 그건 불가능한 일인데. 당신이 그 지점에 도착하면 벌써 욕망의 대상은 뒤로 물러설 것인데 왜 다가가는가. 혹시 당신은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욕망의 지점을 먼저 도달하려고 하는데, 최도형 대장이 그걸 가로챌까봐 불평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걸 훔쳐보는 남극의 이상한 시선이 기분 나쁜 게 아닌가.

남극, 혹은 삶은 우리를 공평하게 미치게 만든다

영화가 남극탐험대의 클리셰적인 캐릭터에만 집착한다는 비난은 또 어떠한가. 수십킬로그램되는 짐을 끌고 몇십일간 눈이 멀 정도로 희디흰 설원을 달리다 지친 부대장이 ‘무거워’라며 자기 손바닥을 칼로 도려내고 있을 때 그게 상투적인 에피소드라고 치부한다면 그건 너무 안이한 비난 아닌가. 지글거리는 성악곡을 카세트로 틀어놓아 내 단잠을 방해하고, 변명이라고는 기껏 좌표를 찾느라 집중하고 있으니 참아달라는 부대장이 밉지 않다면 그건 지나친 까탈스러움이거나 또는 중증의 무감각 아닐까. 며칠 동안 헤맨 끝에 앞으로 한치도 못 나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탐험대원을 향해, 미칠 거 없지 다시 앞으로 나가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이미 마침내 탐험대원 자격을 얻은 것(영화가 원하는 광기와 마주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헬스클럽에서 살을 빼고, 잠을 줄여가며 영어회화를 배우고, 되지도 않는 지시를 내리는 부장과 싸워보지만 당신 인생도 제자리 아닌가. 그런데 왜 당신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위도 1도씩 넘어가려 애를 쓰는가.

우리는 최도형 대장처럼 수많은 유사아버지들, 그러니까 국가와 회사와 군대와 학교의 채근을 받으며 그리고 그 채근을 내면화한 채찍을 스스로를 향해 휘두르며 도달불가능점을 향한다. 위도 1도씩 넘어설 때마다 탐험대처럼 술잔을 기울여 작은 성공을 축하하며 또 앞으로 나아간다. 또는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 최도형 대장들은 자의식 강한 부대장과 부하대원들을 이끌고 책임감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위에 또 수많은 아버지들이 우리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최도형 대장들에게 부당하게 한국적인 폭압형 아버지라는 혐의를 씌운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평생 간절하게 원하던 것이 있는데, 누군가 낙오했다고 해서 쉽사리 그걸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낙오자를 구하러 가는 험한 길이 우리 모두를 살게 한다고 누가 감히 보장하는가. 극한상황에서 일사불란하게 권력의 체계를 일원화하지 않을 때 어떤 위험이 닥칠지 그대는 아는가. 우리의 최도형 대장은 그 많은 오해들을 뚫고 목표점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손가락질을 할 수 없다. 삶은 우리를 공평하게 미치게 만든다.

우리 삶의 피로에 대한 맹렬한 응시

여기가 바로 영화가 숨겨둔 이면의 이야기이다. 탐험의 여정은 관객의 삶의 여정과 맞물리며, 크레바스의 틈은 관객의 정서를 강력하게 빨아들이며 관객을 그 춥고 외로운 설원으로 잡아끄는 것이다. 그리고도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최도형은 도달점을 지났는데, 또 어딘가로 향한다. 욕망의 목적지를 지나쳐버리는 것이다. 유지태 역시 자신의 목표를 지나친다. 목표 바로 앞에서 멈추고 암시만을 주어도 좋을 텐데 영화는 쉬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이렇게까지 하면서 왔어야 옳은 것일까 하는 죄의식과, 몸을 가눌 수 없는 깊은 탈진과, 더이상 갈 곳이 없다는 허무다. 하늘을 날아올라 남극으로 진입하며 영화를 여는 카메라는 다시 날아올라 지금까지 온 여정을 회고하며 뒤로 빠진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으로 욕망의 목적지를 향해 외롭고 낮게 포복하는(또는 죽는) 자신의 육체를 보는 진귀한 체험을 한 것이다.

이때 음악은 꽝꽝거리며 우리의 욱신거리는 늑골 부위를 다시 때린다. 그 늑골 부위는 두 지점인데, 하나는 우리의 어깨를 계속 앞으로 떠미는 욕망이 숨쉬는 곳이며, 또 하나는 그렇게 도달해봐야 혹시 우리가 기껏 닿을 곳이 죽음 아니냐는 각성의 부위이다. 이 영화는 평범한 관습적이고 장르적인 영화들이 멈춘 곳에서 작심하고 더 뚝심있게 나아간다. 우리 삶에 대한 맹렬하고 투철한 응시이며, 우리 사회의 유사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해없는 간극에 대한 냉정하고도 뜨거운 응시이다. 올 상반기에 이 정도로 끝까지 밀어붙이며 우리 사회와 삶의 피로에 대해, 우리 사회 불화의 근원지인 유사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에 대해 한계지점까지 밀고 올라간 작품은 <그때 그 사람들>과 <남극일기> 두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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