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버지의 부음(訃音)’이란 사건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각박한 이야기지만 바쁜 세상에 ‘한번쯤 찾아가 한두 시간 있다가 돌아오는 일’ 이상이 아니다. ‘고인의 넋을 기리는’ 일은 과거 농경사회에서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셨을 때나 대단한 일이다. 친구가 당한 상(喪)은 이렇게 무덤덤하게 찾아왔다. 하지만 오랜 투병생활을 하신다는 말을 듣고도 코빼기도 안 비친 게 찜찜하여 장례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장례식장 분위기는 지극히 ‘일상적’이었다. 영안실의 합리화된 시스템은 시끌벅적한 ‘재래식’ 장례문화에 데어 버린 사람 머리에서 발안된 듯했다. 돗자리 깔고, 음식 나르고, 화투치는 모습은 종적을 감추었다. 간략히 분향을 마친 뒤 소파에 일렬로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게 문상의 전부였다. 방침상 담배마저 피울 수 없자 건물 밖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편하긴 한데 좀 그렇다’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예민해지기 시작한 것은 되레 장례식장을 나와 집으로 향할 때부터였다. 언제 당할지 모를 부모의 상을 막상 접하면 기분이 어떨지 예상해보았고, 죽음을 처음 실감했던 어린 시절의 공포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봤자 순간일 뿐이었다. 오히려 누가 죽든말든 얄밉도록 무덤덤한 세상의 모습에 공연히 풀이 죽었다. ‘내가 죽어도 이럴 거 아냐’라는 심사 말이다. 아마도 세상의 모습이 나의 무덤덤한 심정을 빼닮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생각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고속으로 차를 몰고 오다가 발생한 사건 때문이었다. 개인지 고양이인지 동물의 시체가 시야에 들어왔고,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물컹’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바퀴가 그 위를 굴러 지나갔다. 을씨년스러운 비가 내려 눈 앞에서는 브러시가 왔다갔다 하고, D모 그룹이 연주하는 “얘야 저건 썩은 고양이 시체일 뿐이란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와서 신산스러움은 더해갔다(그래서 M 방송사가 금지곡으로 정했나? 그렇게 깊은 뜻이…). 보통 때 같으면 ‘에이, 오늘 재수없네’라고 넘어갈 일이었지만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브리지트 바르도 같은 동물애호가가 되기에는 몸매가 협조를 안 하지만, 문자 그대로 ‘개죽음’을 보는 이날의 기분은 심상치 않았다.
순간 개나 고양이뿐만 아니라 인간의 죽음의 의미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예전 취향이라면 푸코나 보드리야르를 들먹였을 것 같다. 어쨌든 개가 아니라 사람이라도, 개죽음이 아니라 정상적 죽음이라도 현대인의 죽음은 ‘의료 사고’일 뿐이다. 죽음의 (무)의미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들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당할 것이다. 그뒤로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은 많이 해도 ‘죽어갈’ 걱정은 별로 안 한다는 각성이 갑자기 다가왔다. 미국의 반문화 사상가 티모시 리어리(Timothy Leary)가 “죽음이란 우리가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전율을 느꼈다”고 말한 게 괜한 호기는 아니라는 생각도 다가왔고, 나이지리아의 반체제 음악인 펠라 쿠티(Fela Kuti)가 AIDS로 죽기 직전 했던 “나는 이제 조상들에 가담한다”라는 말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생생하게 다가왔다. ‘잘사는’ 일만큼이나 ‘잘 죽는’ 일도 중요하고, 죽음이란 일회적 행위가 아니라 일련의 과정이라는 (개똥) 철학이 머리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고인의 최종 기착지인 납골당까지 동행했던 것은 이런 심경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다니는 남자의 목소리도 꿋꿋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본 납골당이라는 곳은 나를 또 한번 썰렁하게 만들었다. 마치 목욕탕 옷장이나 사물함 같았다. 소재가 대리석이며, 문을 여닫을 수 없다는 것이 다를 뿐. 그곳에서 사람은 죽어서도 번호를 받고 분류되어 있었다. 나의 ‘개똥’ 철학은 “잘 죽기 위해서라도 잘살아야겠다”로 바뀌고 있었다.
친구와 고인은 그리 원만한 사이가 아니었다. 내게 고인에 대한 기억은 퉁명스러운 전화 목소리로만 남아 있다. 퉁명스러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훨씬 나중에야 어렴풋이 헤아릴 수 있었을 뿐이다. 고인은 ‘원로 문화평론가’였는데, 나는 그 말에서 많은 것을 자의적으로 짐작했다. 고인의 친척 한명이 “우리는 젊었을 때 꿈이 6·25로 인해 날아갔다”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는 우리 젊음은 “5·18로 인해 피우지도 못한 채 망가졌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 6·25는 1950년, 5·18은 1980년에 일어났다. 비과학적일대로 비과학적이 된 나는 2010년쯤 소연이와 지원이가 젊음의 문턱에 도달할 때 그런 일이 없기만을 빌었다(물론 두 시간 뒤 나는 ‘살아갈’ 일만을 걱정하며 마감에 쫓긴 채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신현준씨의 홈페이지는 http://members.tripod.com/hyunjoon_shin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