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라는 만화책이 있다. 고대 이집트의 람세스 왕이 소국 리비아를 공략하다 그곳의 왕녀 아카시아의 미모에 반한다. 이를 질투한 이집트의 왕녀 페드라가 람세스와 아카시아 그리고 그의 연인 리우스를 살해한다. 그로부터 3천년이 지난 20세기 한국. 다시 태어난 이들의 운명적인 사랑은 계속된다. <요정 핑크>로 잘 알려진 만화가 김동화의 작품으로 1980년대 발간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지난 5월16일 첫 방송된 <환생-NEXT>(이하 <환생>)(극본 주찬옥 외, 연출 유정준 외)는 이런 <아카시아>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고려, 일제강점기, 시원을 거듭하는 네 남녀의 안타까운 사랑은 <아카시아>의 안타까움과 닮았다. 이 만화를 감명 깊게 본 시청자라면 <환생>을 통해 그때 그 아련함이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아련함을 담아내기까지 <환생>은 우여곡절이 많았던 작품이다. <환생>은 급조된 드라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보도됐듯 비와 고소영의 출연으로 화제가 됐던 <못된 사랑>과 <이별의 빨간 장미>가 잇따라 무산되면서 <환생>은 방송 5주를 앞두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4월5일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는 ‘전생’이란 모티브만 있었을 뿐 대본도 출연진도 아무것도 없었다”는 유정준 PD는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일정이라 생각했었다”고 털어놓는다. 1, 2회분을 6일 반 만에 찍어냈고, 방송 당일까지 편집이 이루어졌을 정도니 급조된 드라마의 행보는 어쩌면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쾌걸 춘향>이 그랬듯 기대하지 않았던 이 드라마는 호평을 받으며 MBC 드라마를 다시 일으킬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시청률에선 높은 수치를 기록하진 않았지만 방송 첫주 만에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또 다른 ‘드라마 트렌드’를 예고하고 있다. 이는 “급조된 드라마라는 걸 시청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상, 화젯거리를 만들기보단 차라리 우리가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자”는 제작진의 과감한 시도 덕분이다.
<환생>은 ‘전생’이란 소재를 다루면서 으레 그 ‘유치함’을 벗어던졌다. 대신 감각적이고 절제된 기법들을 심어놓았다. 사실 전생은 드라마에서 다루기 힘든 소재다.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야 하는 탓에 스토리와 연출력, 연기력이 조화롭지 못하면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그게 멋지고 웅장한 영화가 아닌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은 TV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몇해 전 방영됐던 전생을 소재로 한 드라마 <천년지애>가 결코 코믹드라마가 아님에도 코믹드라마로 인식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유치한 게 당연할지 모를’ 전생이란 소재를 <환생>은 감각적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루하지 않은 진지함과 불필요한 대사를 없앤 담백함은 방송 1, 2회가 나간 지금 시청자들로부터 “새롭다”는 호평을 받아내고 있다. 1회에서 방영된 좁은 병원 복도를 정화(장신영)와 기범(류수영)이 스치는 장면이나 청동거울을 구입하는 장면 등은 음악과 어우러져 묘한 흡입력이 작용했다는 평가다.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도록 대본을 수정없이 찍을 생각이다”라는 유정준 PD는 “느리고 미묘한 이동숏 등을 통해 전생이란 소재가 주는 신비스러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1∼2회를 두 여주인공의 ‘환상’과 ‘현실’이란 시각으로 다르게 그린 실험적 편집도 돋보였다는 평가다. 1회가 정화의 시각에서 기범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그렸다면, 2회는 수현(박예진)의 시각에서 기범과의 현실적인 사랑을 그렸다.
1, 2회를 합쳐야 하나의 드라마가 완성되는 듯한 효과는 “조용히 우리 색깔을 보여주고 싶다”는 제작진의 의지를 반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3명의 PD와 5명의 작가들의 공동작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미 <떨리는 가슴>이 옴니버스 드라마로 호평받은 바 있지만 <환생>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떨리는 가슴>이 각자의 독립된 이야기를 담아냈다면 <환생>은 하나의 줄기 안에서 네 가지 전생에 해당하는 내용이 2회분씩 이어진다. “전작의 감정선을 잇되 전생별로 서로 다른 내용을 담아야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유정준 PD는 “하지만 이를 통해 되풀이되는 연인들의 순애보가 더욱 리얼하고 재미있게 그려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미 방송이 끝난 1, 2회를 비롯해 현생이 그려질 13∼16회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고개 숙인 남자>의 주찬옥 작가가 맡았고, 조선시대 양반집이 배경인 3, 4회는 <옥탑방 고양이>의 구선경 작가, 고려시대 대몽 항쟁기 기녀와 적장의 사랑을 다룰 5, 6회는 <번지점프를 하다>의 고은님 작가, 1930년대 일장기 말초사건을 모티브로 한 9, 10회는 서숙형 작가, 시대불명의 시원으로 거슬러올라가는 11, 12회는 김현종 작가가 맡아 각 시대에 맞는 적절한 이야기를 뽑아낼 예정이다.
‘땜빵’ 드라마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훌륭한’ 면면을 갖추고 있지만 급조된 탓에 아쉬움은 있다. 전생과 현생의 매개체가 될 장면들이 시간적 여유로 표현되지 못하는 점과 의상, 소품 등 시대별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은 유정준 PD가 밝힌 ‘두고두고 아쉬울 부분’이다. 하지만 실험적인 시도를 적절히 소화하며 방송 2회분 만에 좋은 평가를 얻고 있으니 코믹드라마가 난무하는 요즘의 TV에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기는 충분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