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10회 <씨네21> 영화평론상 [4] - 안시환 작품비평

무표정에 담긴 모든 감정의 가능성

<아들> 안시환 작품비평 전문

<아들>

다르덴 형제(Jean-Pierre Dardenne, Luc Dardenne)의 <아들>(Le Fils)은 상투적 도식이 찢겨진 ‘간격’(interval) 속에 현실을 돌출시키고 이를 통해 영화적 사유가 가능한지를 묻는 작품이다. 다르덴 형제는 이미 <로제타>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 대상을 시각적으로 물신화하는 카메라의 능력과 삶의 고통마저도 엿보려는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에 윤리적 질문을 담으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자살을 위해 가스통을 들고 돌아오는 로제타를 단 한번의 커팅도 없이 롱테이크로 담아낸 영화의 엔딩은 관객으로 하여금 못이 되어 자신의 눈으로 되돌아온 시선을 느끼게 함으로써 로제타의 고통을 타자의 것이 아닌 나의 체험으로 변형시킨다.

<아들>에서 청소년 재활센터에서 목공 일을 가르치는 ‘올리비에’에게 프란시스라는 소년이 배정된다. 다르덴 형제는 소년을 엿보는 올리비에를 보여주지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아들>이 퀴어시네마로 오해될 무렵, 프란시스가 5년 전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인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려줌으로써 올리비에를 용서와 복수의 갈림길에 세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를 감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영화의 시작에서부터 줄기차게 ‘관객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올리비에의 모습과 대상의 정확한 포착을 거부하는 핸드헬드의 탈중심화된 이미지, 그리고 예정된 행위의 좌표에서 이미지를 해방시키는 클로즈업의 반복은 선택의 모호성을 배가시킨다. 다르덴 형제에게서 브레송의 흔적이 감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극화된 영화인 시네마와 구별되는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브레송의 주장은 가시적 영역에 멈추어 서는 관객의 시선을 초월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확장시키려는 고민의 산물이었다. 자신이 늘 다루는 목재의 표면만큼이나 무표정한 올리비에의 이미지(무표정뿐만 아니라 두터운 목과 등)는 전체적 상황에 비추어 해석할 때만이 내면의 감정을 드러낸다. 즉 특정한 표정이 하나의 감정에 인물을 고착시킨다면, 다르덴 형제는 무표정의 이미지를 통해 모든 감정의 가능성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는 들뢰즈가 모든 방향과 모든 측면으로 열려 있다고 말하는 ‘웅성거리는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이미지의 가시성에 대해 비가시성의 우위를 강조하는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위해 영화음악을 배제하고, 숏과 역숏간의 봉합까지도 거부하는 그들의 모습은 금욕적이라 불러도 모자랄 정도다.

하지만 <아들>에서 올리비에에게 다가갈 수 있는 통로는 그의 모호한 행동이 전부이다. 영화는 목공인 올리비에의 일상적인 너무도 일상적인 삶을 기록할 뿐이지만, 바로 그 노동의 시간 속에서 올리비에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의 손’이 차츰 자신을 닮은 ‘목공의 손’으로 바뀌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렇게 프란시스는 점차 올리비에의 아들이 되어간다. <아들>이 목공의 일상적이다 못해 미세한 삶까지도 집요하게 포착하려는 이유는 이러한 변화의 일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아들이 되어가는 아들의 살인자’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요통에 시달리는 올리비에는 고통에 익숙해지기 위한 훈련인 양 매일같이 윗몸일으키기를 반복하지만, 그 고통은 쉽게 마취되지 않는다. 베르토프가 상투적 도식이 균열되는 지점인 ‘간격’에서 ‘현실의 돌출’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듯이, <아들>은 용서와 화해의 휴먼드라마나 피로 물든 복수극이라는 도식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다르덴 형제가 보기에 용서와 분노의 감정은 무 자르듯 명쾌하게 갈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다르덴 형제가 <아들>에서 돌출시키려는 현실의 모습이다. 용서하면 할수록 프란시스가 아들의 살인자라는 사실은 더욱 명징해지고, 분노하면 할수록 점차 아들이 되어가는 프란시스를 확인해야 하는 딜레마, 그것이 ‘두 아들’을 둔 아버지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이다.

<아들>

그의 이러한 딜레마가 폭발하는 지점은 영화의 후반부이다. 올리비에는 프란시스가 자신의 아들인지 살인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올리비에가 자신이 죽인 소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프란시스는 산속으로 도망가고, 그를 쫓아간 올리비에는 프란시스의 목에 손을 얹고 힘을 싣는다. 한번쯤은 그 표정을 비출 것도 같지만, 화면에는 거친 숨소리를 실은 그의 두터운 뒷모습만이 여전히 보일 뿐이다. 이는 그가 힘을 풀고 멍하니 앉아 있는 순간, 그리고 목재를 싣기 위해 되돌아가는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우리는 올리비에를 두고 섣불리 용서니 화해니 말할 수 없다. 그는 용서했기 때문에 죽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죽음 앞에서 올리비에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는 프란시스로부터 죽어가던 아들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죽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목재를 정리하는 올리비에에게 다가간 프란시스가 조용히 그의 일을 거들고, 그들은 목공으로서의 일상적 행위를 통해 원한 관계에서 부자 관계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그들에게 각인된 상처를 봉합하듯 목재를 감싼 천을 묶으려는 순간 영화는 갑작스럽게 엔딩을 맺는다. <아들>은 그 엔딩에서조차 프란시스가 올리비에에게 살인자인지 아들인지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목적은 올리비에의 구체적인 선택을 보여주고 관객이 수동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의 영점(zero point)을 보여주고 그 판단을 관객의 몫으로 전이시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마치 감정의 영점인 무표정의 이미지를 통해 모든 감정의 가능성을 열어놓듯이 말이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