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냥 정공법으로 합니다”
창간 10주년을 맞이한 <씨네21>이 ‘한국영화의 현재를 묻다’라는 주제로 7회에 걸친 특강을 준비했다. 감독, 제작자·배우로 구성된 7인의 강연자 모두는, 각자의 분야에서 일정한 업적을 남기며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인공들. 감독 중에선 박찬욱·홍상수·봉준호 감독이, 배우로는 백윤식과 문소리가, 제작자로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와 MK픽처스 심재명 대표가 강단에 선다. 지난 5월11일 연세대 위당관에서 백윤식의 강연으로 시작된 이번 행사는 앞으로 3주에 걸쳐 진행될 예정이며, <씨네21>에는 이들 강연의 재구성본이 실리게 될 것이다. 다음주에는 배우 문소리와 감독 박찬욱의 강연이 이어진다.
지난 2년에 걸쳐 한국 영화계가 재발견한 중견배우와의 진솔하고도 조심스런 대화가 이루어진 곳은 축제의 열기로 들썩이는 연세대 한쪽에 마련된 강연장.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진출작 <그때 그 사람들>의 임상수 감독이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때, 칸의 붉은 주단이 아닌 <씨네21> 독자들과의 선약을 택한 백윤식을 향해, 강연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공동사회자로 나선 <씨네21> 이종도 기자와 마술피리 오기민 대표와 관객이 준비한 질문, 그리고 이에 대한 백윤식의 대답은, 그의 데뷔 시절과 지금의 영화현장의 다른 점에서 시작해서 그가 맞이한 제2의 전성기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최근 몇년 자신이 누리고 있는 관심과 애정이 한국영화를 향한 관객의 아낌없는 지지, 그리고 숱한 영화인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않았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이들 모두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74년과 76년작인 <멋진 사나이들>과 <단둘이서> 이후 오랫동안 영화를 쉬다가, 몇년 전 <불후의 명작>에서 잠깐 모습을 비추었죠. 그뒤에 <지구를 지켜라!>로 굉장히 험하게 제2의 데뷔를 했는데요. (일동 웃음)
=<멋진 사나이들>이 영화 데뷔작으로 공군사관생도 역할이었어요. <단둘이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문근영양 정도 되는 서미경씨와 함께 출연했었죠. 저도 그런 여배우와 함께 공연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알려드립니다. (일동 웃음)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제작 시스템이 많이 다르죠.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조명도 달랐죠. 로케이션 촬영을 할 때면, 은박 패널 같은 것으로 태양광을 반사시켰는데, 이것 때문에 배우들이 눈을 못 떠요. 그때 활동한 분들이 눈이 나빠진 게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웃음) 그리고 TV가 굉장히 인기가 많았어요. 배우들이 좀더 활동하고 싶어하는 분야가 TV였고. 요즘은 예전에 비해 영화쪽에 좀더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죠.
-한국 영화계에서 배우의 힘이 세지고, 배우가 공동제작을 하는 등의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매니지먼트사가 공동제작을 하거나, 연기자의 극대화된 힘을 가지고 지분을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저는 옛날처럼 영화사가 재력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요즘 영화사 대표님 보면 다 훌륭한 인재들이고, 그런 분들은 돈을 벌더라도 다시 영화에 투자를 할 거거든요. 순수하게 영화로 돈을 벌어서, 제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나요? 사실 이건 꿈이죠, 꿈.
-힘든 역할로 오랜만에 시작한 건데, 과정과 계기가 궁금하네요.
=<지구를 지켜라!>는 나에겐 기념비 같은 작품이죠. 당시가 한국영화의 부흥시대 아니었습니까. 그러다보니 나한테도 시나리오가 많이 왔어요. 근데 대개의 경우 내가 그저 소모품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달랐어요. 새로운 장르에, 캐릭터도 새롭더라고요. 하지만 배우이기 전에 나도 사람 아닙니까. 사람 입장에서 시나리오를 보면 볼수록(웃음) 장면이 눈에 선하잖아요. 머리는 다 깎이지, 옷은 팬티 바람에…. 사람 백윤식으로서는 갈등이 심했어요. 근데 배우로서 이제 막 걸음마를 떼고 있는 우리 큰아들, 백도빈이 시나리오를 보더니, 이 작품은 한번 덤벼볼 만하다고 하더라고요.
-영화의 선정 기준은 무엇인가요.
=처음 시나리오를 접하면 본인 역할 위주로 보고 난 뒤에 전체를 보게 되죠. <범죄의 재구성> 같은 경우는 ‘요거는 왠지 나 아니면 맛이 안 나겠다’(일동 웃음) 그런 게 있었어요. 그런 걸 보고 ‘필’이라고 하나요? 그 다음엔 감독을 중요하게 봐요. 다음은 영화사. 창작활동의 현실적인 측면을 뒷받침해줘야 하니까 중요하죠.
-최근 세 작품의 감독님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그분들이 없는 자리니까 좀 씹어주시죠. (웃음)
=(갑자기 일어나서 웃옷을 벗자, 일동 웃음) 벗으면 뭐, 화끈한 얘기를 해주나 싶겠지만, 그건 아니고요(웃음) 먼저 장준환 감독.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말이, 이 친구가 천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언뜻 봤더니 얼굴이 평범해 보이진 않더라고요. 그리고 작품을 보니까 약간 이상해요. 야, 희한한 친구 다 있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했나, 그러면서 점점 믿음이 가더라고요. 꼭 소년 같아요. 처음엔 이 모습과는 다른 면이 있겠지,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게 다인 거야. (웃음) 건드리면 상처받을 것 같고. 그런데 고집은 꽤 세요. 그런 건 좋은 거죠. 하지만 주관에 집착하다보면 주위에 스트레스를 많이 주기도 하죠. (웃음) 그리고 최동훈 감독은, 그 감독도 또 천재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근데 같은 천재라고 해도, 성격에선 차이가 있어요. 성격이 다르니까 일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다르죠. 최 감독은 촬영을 나가면 만날 가정방문을 해요. 이 친구는 지방촬영을 가면 밤에 만날 배우들 방문을 똑똑 두드려요. 캔맥주 몇개를 사서 가정방문을 다니는 거죠. 배우하고 계속 얘기하면서 시간을 가지고, 뭔가를 나름대로 풀어나가려는 건데, 그게 캔맥주 몇개 가지고 됩니까. 그러다보면 나가서 한잔하지, 이러고. 나갈 때는 박신양씨나 배우들 총집합시키는 거죠. 아주 편해요. 항상 웃는 낯이고. 그리고 임상수 감독. 대단히 문제가 있는 감독이에요. (웃음) 처음엔 임상수 감독이 최동훈 감독의 사부라는 걸 몰랐어요. 최 감독이 임 감독 밑에서 조연출을 했거든요. <그때 그 사람들>의 경우 내용 자체가 그러니까, 내가 숙고의 기간이 길었어요. 그랬더니 임 감독이 어느 날 부담없이 미팅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준비를 하고 전투에 나가려고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을 봤는데, 참 독특하더라고요. 점심 먹자고 만나서는 프로듀서랑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다가 결국은 자리를 옮겼죠. 여기에 갑자기 최동훈 감독까지 나타나는 바람에 새벽까지 마시게 됐어요. 임상수 감독, 쿨합니다. 독특한 연출감을 가지고 있잖아요. 최동훈 감독의 사부인데 오죽하겠습니까. 그 사람도 천재입니다.
-세 감독 중에 어떤 사람이 제일 성격이 더럽던가요. (웃음)
=흔히 임상수 감독이 제일 그럴 것 같다고 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임 감독은 내가 제안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잠깐 생각해요. 그리고는 오케이해요. 이럴 때는 있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은 내가 재촬영을 해달라고 했는데, 안 해주더라고요. 난 세번이나 재촬영을 해줬는데, 자기는 내가 요구하는 걸 한 번도 안 들어주는 거야. (웃음) 내가 재촬영하는 김에 내 맘에 안 드는 장면을 하나 다시 하자고 했죠. 나랑 한석규씨랑 김응수씨랑 셋이 “이게 싸나이 가는 길이야”라면서 거사를 모의하는 장면에서, 카메라 두대를 뻗쳐놓고 찍었는데, 배우들은 카메라가 두대 있으면 두대를 다 먹으려고 해요. 하지만 감독은 알다시피 좋은 것만 쓰잖아요. 그러다보면 배우는 환장하죠. 현장에서 감독이 모니터를 보더니, 어떤 카메라의 촬영 분량을 쓰겠다고 정해주더라고요. 그렇게 찍었는데,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요. 계속 부탁을 하다가 결국, “뭐, 녹음이라도 다시 하지?” (웃음) 그랬는데도 안 된대요. 그래서 어디 완성된 작품 봐서 잘 못 만들기만 해봐, 죽을 줄 알아, 그랬죠, 농담으로. 근데 시사회를 봤는데 너무너무 맘에 드는 거예요. 시사 끝나고 임 감독이 “선생님 어떻습니까” 그러기에, “아, 연출 많이 늘었어”라고 말해줬죠. (일동 웃음)
-최근 영화나 <서울의 달> 같은 드라마 그리고 CF 등을 보면 본인은 웃지 않고 남들을 웃긴다든지, 본인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상대방이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데, 본인의 연기철학은 무엇인가요.
=그냥 정공법입니다. 코믹한 장르라고 해서 코믹에 대한 기교를 부린다든지 그런 건 없고요. <서울의 달>의 미술 선생님 같은 경우도 나에겐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였는데, 그냥 그 인물을 정공법으로 소화했는데, 자꾸 웃음을 유발하다보니까 다들 내가 웃기는 배우라고 생각하더군요.
-<지구를 지켜라!>에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우주인의 말투, <범죄의 재구성>에서 “시추에이션이 좋아” 같은 말투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대사나 말투는 본인이 직접 착안한 건지.
=그걸 감독이 접수를 안 하면 결국 표현이 안 되겠죠. 내 맘대로 할 거야, 라고 해도 편집으로 다 잘리잖아요. (웃음) 참, 영화는 가위가 문제예요. 옛날 군사문화 때는 검열이 문제였는데, 요즘은 배우 입장에서 가위가 문제가 많죠.
-애드리브가 많은 편인가요.
=저는 언제나 감독과 상대배우를 존중하는 편이에요. 튀려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죠. 모든 애드리브는 감독이나 동료 연기자들과 함께 소화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봐요. 결국 그게 흥행이나 작품성하고도 연관이 되거든요. 애드리브를 남발하면 작품이 이상한 방향으로 갈 수 있어요.
-같이 출연한 한석규씨나 박신양씨의 연기는 어떤가요.
=둘 다 정통파예요. 그런 배우들은 항상 절제를 하기 때문에 상대 연기자에게 충실해요. 상대방에게 최대한 동화되려고 하고, 튀려고도 안 해요. 박신양씨는 <범죄의 재구성> 때, 처음에 내 연기를 보고 아주 의아해하더라고. ‘저 양반이 저렇게 스타트를 해서 이 신을 어떻게 마치려고 하나’ 싶었대요. 자기의 정공법으로 볼 때는 내 연기패턴이 황당했던 거죠. 극과 극을 왔다갔다하고, 생뚱맞고, 톤 자체도 팍 올라가기도 하고. 난 박신양씨의 그런 점이 좋아요. 그렇게 정석을 중요시하는 배우는 한번 틀을 깨기 시작하면, 대단하죠. <파리의 연인> 때 박신양씨, 이전에 했던 연기가 아니었잖아요. <범죄의 재구성>을 하고서 깨졌다고 봐요. 한석규씨도 마찬가지. 한석규씨는 예전에 <서울의 달>을 할 때 완전히 애기였는데도 그때도 아주 노블하게 연기를 했어요. 박신양씨나 한석규씨나, 한국영화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해준 좋은 배우들이죠. 내가 그 덕을 많이 본다고 항상 말해요.
-한국영화가 다루어줬으면 하는 소재가 있나요.
=할리우드처럼 나이 많은 배우와 젊은 배우의 대립을 다룬 작품이 있었으면 해요. 동료나 후배들과 함께 출연할 만한 영화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차기 작품은 어떤 것인가요.
=그것 때문에 머리나 수염을 기르고 있어요. <싸움의 기술>이라고, 코리아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하고 5월25일에 크랭크인하는 작품이에요. 거기서는 재희라는 친구와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됐죠. 신한솔이라고, 최동훈 감독의 영화학교 바로 밑의 후배라는데, 또 천재예요. (웃음) 스타일이 똑같다는 건 아니지만, 장준환 더하기 최동훈 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기대해볼 만하죠. (웃음)
<영화인 7인 특강 - 백윤식 편> 전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