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의 제목은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건립과 현대철학의 상관관계.” 무슨 명분을 갖다붙여도, 본질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는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건립을 위해 400억원을 냈고, 고려대학교는 그 돈의 가공할 덩치를 기리기 위해 “명예”롭게 영수증을 떼어주었다. 이것은 “철학”적 사건이다. 한국 철학계에 일찍이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던가?
학생들은 학위에 전공표기가 잘못된 것을 문제 삼았다. 이건희 회장이 ‘명예’로나마 ‘박사’의 실력을 인정받는 분야는 ‘철학’이 아니라 노동탄압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런 학생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전공자의 입장에서 봐도 이건희 회장은 철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노조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해 감시하는 실력만은 ‘박사’의 학위가 무색할 정도로 탁월하다.
고려대의 보직교수들이 일괄 사퇴서를 냈다. 웃지 못할 코믹물은 여기서 괴기스런 호러물로 전환한다. 전직 대통령의 진입이 물리적으로 저지당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사표. 그 귀중한 사표가 일개 기업 회장의 행사장 진입이 저지됐다고 총장 책상 위에 일괄적으로 올라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독신(瀆神)과 불경(不敬)이야말로 종교인의 가장 큰 죄. 보직 교수들의 일괄 사퇴는 모욕당하고 거역당한 신의 노여움을 달래는 거룩한 희생양 제의가 아니겠는가?
이번 사건은 종교적 경지에 달한 북조선 수령 문화의 자본주의적 버전이다.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가? 스키를 즐겨도 인간의 반열에 낄 수 없기에 레인을 통째로 임대하는 분이다. 외유라도 하실 참이면 교황의 행차를 무색할 정도의 예우가 조직된다. 색깔별로 차려입은 유니폼 점퍼들의 무리 속에 회장님이 거룩하게 출현하시는 장면은 사이비 종교단체의 집회 혹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카드섹션을 연상케 한다.
북조선에서는 수령님이 인민을 먹여살린다. 남조선에서는 삼성이 국민을 먹여살린다. 인재 한 사람이 10만을 먹여살린다고 하지 않는가. 삼성에 인재 3천이 없겠는가? 곱하기 10하면 남조선 인민 전체를 여섯번 먹여살리고도 남음이 있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신단수로 내려와 나라를 세우지 않았던가. 회장님은 현대의 재림 환웅이시다. 박정희 덕에 먹고살던 불쌍한 인민들은 이제 이건희 덕에 먹고살고 있다.
대한민국은 삼성이 먹여살린다. 그 삼성은 내가 먹여살린다. 주머니 속의 휴대폰, 거실의 텔레비전, 부엌의 전자레인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면, 삼성이여, 다음에 휴대폰 광고할 때에는 과감하게 이렇게 해보라. “소비자 여러분, 너희들은 우리 덕에 먹고삽니다.” 한 사람의 인재가 제 밥 벌어 먹으면서 따로 10만을 먹여살리는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의 인재는 여러 범재들의 노력을 먹고산다는 것이다.
“400억을 받고도 모자라서.” <중앙일보> 기사의 제목이다. 누가 삼성 계열 아니랄까봐. 언제 학생들이 돈 적게 줬다고 시위를 했던가? 바로 여기서 명예로 박사 학위 받은 이들의 철학이 드러난다. 삼성 철학의 상상력 밖에서는,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도 있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그 가치는 인문정신을 담당하는 교수들이 앞장서서 지켰어야 한다. 그들이 방기한 그 일을, 학생들이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교수들은 그 장한 학생들을 ‘징계’하겠다고 벼르고 자빠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