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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연극의 세계 [2]
사진 오계옥 2005-05-13

인식의 전환 - 일방향적 계몽에서 쌍방향적 소통으로

“이젠 부모도 어린이와 함께 즐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아동청소년예술센터가 주최한 어린이 연극놀이 교실의 수업 모습

올해도 어김없이 봄비가 가문 땅을 적신다. 비 오면 진흙탕 흙바닥에 맨발 적시며 날름날름 빗물 받아먹던 어린 시절… 이 추억을 10년 전, 20년 전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 이제는 어른이다. 대신, 황사에 전 산성비에 살갗 타고 머리 빠질까 서둘러 집으로 귀가하는 21세기의 아이들. 그들은 자연을 익히기 위해 캠프를 가고 박물관을 찾는다. 이는 요즘 아이들에겐 매연에 누렇게 바랜 태양이 뜨고 저무는 나날처럼 자연스럽다. 하나 이들은 흙과 물, 나뭇가지 대신 만질 듯 손잡힐 듯 머릿속을 웅웅거리는 동화 속, 가상 속, 먼나라 속 이야기들과 만난다.

‘아동극’이라는 한자투의 말 대신 ‘어린이 연극’ 혹은 ‘가족극’이 연극계의 새로운 언어와 시스템으로 생동하고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산업이 장사가 된다는 속셈으로 대형화, 상업화 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아이들의 눈높이만큼이나 명징하게 세상과 서로 소통하고자 하는 예술적인 시도다. 때로 극장 안에서 객석과 거리를 두고 속삭이는 ‘연극’의 형태로, 때로는 열린 마당에서 아이들의 생각을 되묻는 적극적인 ‘연극놀이’의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관객을 다양하게 만나고자 하는 작업자들의 욕구와 두터워지는 어린이 연극 관객층의 요구가 만난 덕이다.

“좋은 해외작품들을 보면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저런 작품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되죠. 대단한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오한 대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순한 상황만으로 상징과 은유가 깊어지는 거예요.”

정교하고 독특한 시각미술과 탄탄한 이야기 구성으로 호평받고 있는 작품 <하륵이야기>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배요섭은, 아이들은 어차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연극을 본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들이 극을 이해하는 방식은 확실히 달라요. 깨닫게 해줘야지 의도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죠. 아이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그들에게 맡겨요. 저와 저희 집단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하죠.”

일방향적인 계몽과 교육이 아닌 쌍방향적인 소통과 반응, 어른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비밀의 열쇠를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과거, 어린이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극장 밖에서 간만의 회포를 풀었던 엄마들의 관행과는 달리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연극을 보고 아이들만큼이나 어린이 연극을 즐긴다는 것은 아이들이 노숙해졌다는 의미인가, 어른들이 유치해졌다는 신호인가. 이에 대해 호주 극단 렘(REM)의 예술감독이자 라트 어린이 극장의 상임연출가인 로저 린드는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 연극과 어른 연극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추세는 전세계적이에요. 그러면서 뭉뚱그려 좋은 얘기만 하지 않고, 두려운 것, 어두운 것, 어려울 수 있는 것들을 깊이있고 집중적으로 다뤄가는 추세를 보이죠. 안데르센에게도 예쁜 동화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성인극에 진입하기 전 단계의 훈련 과정 정도로 인식하던 과거와는 달리 최고의 예술가들이 차선으로서가 아니라 최선으로서 어린이 연극에 접근하고 있지요.”

물론, 이러한 조류가 주류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중요한 대화의 상대로 삼으면서, 그들에게조차 설득가능한 ‘진실’의 이름을 모색하고자 하는 어른들의 시도는 이제 마악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어린이 연극 전용극장 - 사다리 아트센터 어린이 극장

“화장실은 물론 객석 높이도 어린이를 배려해서 지어”

색색의 카펫에서 아이들이 뒹군다. 엄마와 함께 낮은 계단 턱에 앉아 그림책을 읽고 있다. 사다리 아트센터 어린이 극장의 로비 풍경이다. 20여년 활동해온 관록있는 어린이 연극 극단 사다리의 오랜 숙원이 지난 4월13일 사다리 전용극장의 개관으로 실현됐다. 아이들에게 초점이 맞춰진 이 공간에서 어른들은 불편할 수 있다. 화장실 역시 아이들 엉덩이와 다리 사이즈에 맞춰진 변기 위주이며 개수대의 높이도 아이들에게 맞춰져 있으니 말이다.

“애들보고 눕지 말라고 해도 카펫이 푹신하니까 자꾸 눕더라고요. 단원들이 하루에 서너번씩 청소기를 돌려야 하죠.”

사다리 아트센터 김보경 기획팀장은 여전히 40여명의 단원들과 함께 밤마다 극장 구석구석을 수정하느라, 극장 개관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한다. 3개의 전용관을 가질 사다리 아트센터는 현재 동그라미 극장만 개관한 상태이며 오는 6월 네모 극장과 세모 극장을 개관할 예정이다. 네모 극장은 객석을 슬라이드식으로 움직여 무대를 마당놀이식으로 운용할 수 있으며, 세모 극장은 부채꼴로 펴진 객석의 형태로 또 다른 개성을 가진다. 모든 극장의 객석은 높은 경사도를 가지고 있는데, 웬만큼 키가 큰 어른이 앞에 앉아도 어린 관객의 시야를 막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80평 정도의 야외공간은 야외놀이터와 휴식처가 마련될 것이며, 대학로에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잠시 쉬고 노닐다 갈 수 있는 곳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연극과 극장에 다가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극단 사다리는 88년 교육극단 사다리로 출발할 때만 해도 주로 방문공연을 위주로 하다가 극장으로 들어가면서 교육효과가 강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지난 몇년간 목동 브로드홀과 동영아트홀 등 극장을 1년씩 장기 계약해서 운용했던 데에는 이렇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교육과 교류의 효과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극장이 힘이 세요. 좋은 레퍼토리를 상연하려고 해도 극장이 없어 작품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죠. 어린이 공연이 중요한 레퍼토리가 됐는데, 대학로 소극장에서 낮시간에만 상연하고 성인극과 교체해야 하다 보니까 무대와 객석이 체험을 공유하고 교류할 시간이 없는 거죠. 아이들에게 걸맞은 극장 환경도 아니었고요. 부모님들은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좋은 환경을 서비스하는 곳에 데려가고 싶어하니까요.”

김보경 기획팀장은, 어린이 전용극장 설립을 수요와 공급이 맞아떨어지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요구로 보았다.

“어린이 연극은 관객층이 형성되어 있어서 수입적으로도 괜찮지만 그에 관한 인프라가 부족했지요. 아이들은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하니까요. 문제는, 우리나라 어린이 공연 관객층이 주로 4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라는 데 있어요.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이런 문화체험과 단절돼요. 중학생만 해도 관람가능한 대학로 작품이란 몇편의 코미디뿐이니까요. 연극과 아이들이 같이 꾸준히 성장해야 그 아이들이 자라서 좋은 성인 관객이 될 수 있어요.”

사다리 아트센터는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교육을 이제 연극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입력하고 실행할 수 있는 하드웨어가 될 것이다.

<하륵이야기>의 무대·인형 디자이너 김경희

“아이들에게 방긋방긋 웃는 것만 강요할 순 없다”

김경희는 학전의 <우리는 친구다>(번안/연출 김민기)의 무대 디자인, 뛰다의 <하륵이야기> 무대와 인형, 가면 디자인, 한영프로젝트 <다리>(The Bridge)의 무대 디자인 등 최근 어린이 연극 디자인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신진 디자이너다. 그는 그가 만든 작품을 관객과 함께 보는 걸 즐긴다. 어린 관객의 의외의 반응을 보는 데 재미를 들인 셈인데, 별다른 뜻 없이 한 장치들에 왜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가끔은 제작과정보다 이게 더 궁금하고 신난다.

“연극 한번도 안 보고 죽는 사람도 많잖아요?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고 그런 제 가족에게 셰익스피어의 <상자속 한여름밤의 꿈>(원작 셰익스피어, 연출 이현주, 각색 박지선)을 보여준다면, 그들이 여타의 것에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를 즐기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인형과 가면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에게는 어린이 관객도 마찬가지다. 너희의 취향은 이거니까 이걸 봐, 라고 어른들이 강요하다시피 하는 ‘빨주노초파남보’류의 화려한 색감에 거부감이 있는 그는, 가면과 인형이 이야기의 구조와 인물 사이의 관계를 선명하고 풍부하게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근원을, ‘원시’에서 찾는 편이었다.

“제 작품을 무서워하는 친구들이 있죠. 실은, 많죠. <상자속 한여름밤의 꿈>도 울면서 나가기도 했고요. 하지만 해맑고 밝은 게 세상이 아닌데, 방긋방긋 웃는 것만 보여줄 수는 없잖나요?”

그는 “아이들에게 공포라는 감정은 숨긴다고 되는 게 아니다”라는 말에 동감한다. 그래서 오늘도 오래된 미라의 슬픈 표정의 주름에서 작은 문양을 발견하고 그것을 베껴 가면 안에 그려넣는 데 망설임이 없다.

글 동이향/ 자유기고가